화면 우측에 “표암 강공 69세 소상(豹菴姜公六十九歲小像)”이, 그 좌측에는 “신축년 9월 11일에 내가 어용도사 감동관으로서 규장각에 나가 화사 한종유에게 부채 위에 나의 작은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제법 (나의 모습과) 비슷했다. 돌아와 이 그림을 서손 이대에게 준다[辛丑九月十一日, 余以御容圖寫監董官, 赴奎章閣 使畫師韓宗裕, 圖余小眞於便面上, 頗得髣髴, 歸與庶孫彛大].”는 글이 각각 적혀 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재위 중에 세 차례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였다. 첫 번째 어진 제작은 1781년 8월 19일에 정조의 지시로 시작되어 9월 16일에 끝났다. 이때 한종유는 주관화사로, 강세황은 조윤형(曺允亨)과 함께 감동관으로 어진도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사실을 통해 이 초상화가 바로 그 시점에 강세황이 한종유에게 의뢰해 그려 받았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이 초상화를 자신의 서손(庶孫) 강이대(姜彛大)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세황의 초상화는 「강세황 육십구세상」을 포함해 현재 12점 정도가 전하고 있다. 이 중 4점은 그가 스스로 그린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머지 8점은 한종유, 이명기(李命基) 등 다른 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 육십구세상」이 제작된 지 1년 후에 강세황이 직접 그린 「자화상(自畵像)」[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중 소장]이나, 이로부터 다시 1년 뒤인 1783년(정조 7)에 이명기가 그린 「초상(肖像)」[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중 소장]은 그의 초상화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다. 이 2점의 영정은 1975년 5월 16일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명칭은 ‘ 강세황 초상(姜世晃 肖像)’이다.
「강세황 육십구세상」에서 강세황은 야복(野服)과 관모(冠帽)를 착용한 채, 소나무 아래에서 짚방석을 깔고 오른손에 책을 들고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정면을 응시하고 오른팔을 비스듬히 위로 솟은 소나무에 살짝 기대고 있다.
한종유는 배경이 되는 소나무는 다소 꼼꼼한 필치를 사용한 반면, 강세황에 대한 인물 묘사는 상대적으로 간결한 필치로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그는 강세황 안면의 윤곽과 주름에 갈색 필선을 사용하였으며 눈썹, 머리카락, 수염에는 거친 묵선을 써서 마무리하였다.
한편, 이 초상화에서는 강세황이 미묘하게 미소를 짓고 있음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 중에서 이와 같이 주인공의 미소 띤 표정이 표현된 작품이 매우 드문데, 이는 강세황이 자신의 손자에게 주기 위해 이 초상화를 제작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 선면에 제작된 것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에서 「강세황 육십구세상」은 특이한 사례의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2016년 3월 1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