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益山 深谷寺 七層石塔 出土 金銅佛龕 및 金銅阿彌陀如來七尊坐像)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심곡사에 있는 칠층석탑에서 출토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금동불감과 금동불보살상이다. 모두 도굴이나 훼손된 적 없이 원형 그대로의 형태로 발견되었다. 금동아미타삼존불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고, 불감 뒤편 4구의 불보살상은 1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라마 불교 미술이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과정을 볼 수 있어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심곡사 칠층석탑의 해체 · 보수 과정(2012년 6월) 중에 중대석(中臺石) 방형공(方形孔)에서 백자호(白磁壺)와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이, 지대석(地臺石) 방형공에서 금동불감(金銅佛龕) 1점과 그 불감 내부에 모셔진 7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이 발견되었다.
지대석 방형공은 사각형 형태의 홈으로 가로 25㎝, 세로 24㎝, 깊이 18㎝의 크기이고, 지대석 윗면 중앙에 마련되어 있었다.
금동불감은 밑판, 좌우 측면판, 뒤판, 위판이 각각 한 판으로 제작되었고, 문비(門扉)[문짝]만 두 판으로 제작되었다. 위판은 지붕이 형식화된 형태로, 네 면의 모를 죽인 단순화된 녹정형(盝頂形)으로 되어 있고, 정상에는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위판과 밑판은 끝부분을 꺾어 측면판과 뒤판을 안쪽으로 끼우도록 하였으며, 양 측면판과 뒤판은 넝쿨무늬가 새겨진 장식판을 덧대 못으로 고정하였다. 위판의 앞쪽 윗부분에는 안쪽으로 별도의 장식판을 덧대었다.
문비 전면은 원문(圓文)을 중첩시켜 생긴 능형문(菱形紋)과 연화문(蓮花紋)이 선각되어 있으며, 문비 안쪽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배치되어 있다.
감실(龕室) 내부 정면 중앙에는 여래설법도(如來說法圖)를 타출(打出) 양각기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 불좌상(佛坐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합장한 보살좌상(普薩坐像) 2구가 있고, 불보살상 사이에 상단에 4구, 하단에 2구의 승려상이 묘사되었다.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신장상(神將像)이 각 1구씩 위치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금동불감과 비교해 보면, 이 불감은 15세기 전반 혹은 중반 무렵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곱 구의 불상은 불감의 안쪽에서 발견되었다. 금동불감 바닥에는 불상과 보살상의 대좌(臺座)와 연결할 수 있는 일곱 무리의 구멍이 발견되어 불감 매납(埋納) 당시에 일곱 구의 불보살상이 정연하게 봉안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감의 앞쪽에서 중앙의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과 좌우에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 · 대세지보살좌상(大勢至菩薩坐像)이, 그리고 불감의 뒤쪽에서는 중앙에 금동불좌상(金銅佛坐像) 두 구, 그리고 그 좌우에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普薩坐像), 금동지장보살좌상(金銅地藏菩薩坐像)이 배치되었다.
불감 앞쪽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의 본존(本尊)인 아미타여래는 높은 육계(肉髻)에 큼직한 연봉(蓮峯) 모양의 정상계주(頂上髻珠)를 지니고 갸름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가사(袈裟)는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의습(衣褶)으로 걸치고, 허리가 약간 길어진 신체를 보인다. 양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아래로 내린 수인(手印)을 결하였다.
좌협시(左脇侍) 보살좌상은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우협시(右脇侍)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맞닿은 연화대좌(蓮花臺座), 보살상들의 커다란 꽃 형태의 원반 모양의 귀고리, 가슴에 U자형으로 늘어진 목걸이 등 14세기 후기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원대 라마 양식 불상의 영향을 받은 불보살상의 양식적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
아미타불좌상(阿彌陀佛坐像) 내부에서는 사리(舍利)를 담은 수정병과 함께 청동후령통(靑銅候鈴筒), 곡물과 직물 등의 복장물(腹藏物)이 발견되었고, 협시보살상(夾侍普薩像)에서도 청동후령통과 구슬, 직물 등의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본존과 협시 모두에서 조성시기, 발원자 및 발원 목적 등을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은 나오지 않았다.
불감의 뒤편에는 중앙에 불좌상 두 구와 양측에 보살상 한 구씩 총 4점의 불보살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 구의 불좌상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한 양손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거의 동일한 형식 및 양식을 보인다.
불좌상 향우(向右) 측에는 두 손을 앞에 모아 정병(淨甁)을 받친 관음보살좌상이 있고, 향좌(向左) 측에는 두건을 쓰고 두 손을 앞에 모아 보주를 받쳐 든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이 있다.
불감 내 금동아미타삼존불(金尊阿彌陀三尊佛)과 이 네 구의 금동불보살상(金銅佛菩薩像)은 다소 다른 조각 양식을 보이고 있으므로, 각 조성 시기에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감 뒤편 네 구의 불보살상들 중 불좌상 두 구에는 14세기 불상의 특징 중 하나인 내의를 고정하는 금속제 장식 표현이 없고, 상체가 다소 짧아 둔중한 비례를 보이는 등 15세기에 조성된 불상 양식의 특징이 보인다.
향우 측의 관음보살은 높고 화려한 보관과 가슴 앞의 영락(瓔珞) 장식에서 명대 라마 양식 보살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따라서 15세기 전반 혹은 중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았던 금동불감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불감 내부 전면에 있었던 금동아미타삼존불은 14세기에 조성되어 심곡사에 전세(傳世)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곡사 칠층석탑 자체의 건립 시기도 15세기 전반 혹은 중반 무렵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바로 이 시기에 금동불감과 불감 뒤편에 배치한 4구의 불보살상을 함께 새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심곡사에 전세되던 금동아미타삼존불을 함께 같은 불감에 넣어 매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은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에서 출토된 것이 분명하며, 모두 도굴이나 훼손된 적 없이 한 불감 내에서 원형 그대로의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티베트 불교 미술의 영향을 받은 원대 및 명대의 라마불교 미술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2016년 2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