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정광사 소조미륵여래입상(濟州 淨光寺 塑造彌勒如來立像)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정광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미륵여래입상이다. 1935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사 미륵불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 사찰 측에서 공모한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화승 김일섭이 조성한 높이 101㎝의 미륵여래입상이다. 대좌의 묵서와 김일섭의 『연보』 기록을 통해 조성 시기와 조각승, 조성 동기 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김일섭의 불상 양식 연구와 근대 불교 조각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에 있던 주존불(主尊佛)이 1934년 화재로 소실되어, 1935년 새 불상을 조성하기 위한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정광사 미륵여래입상은 이때 김일섭(金日燮)[금용(金蓉) 일섭(日燮), 1900~1975]이 제작하여 출품한 불상 축소모형 작품이다.
김일섭의 작업일지인 『연보(年譜)』의 기록에 따르면 1935년 7월 23일부터 8월 3일까지 조성하여 완성하였으며, 참여 화원은 김보응(金普應)[보응(普應) 문성(文性), 1867~1954], 김일섭, 이석성(李石城)이다.
보응 문성은 근대기 대표적인 전통 화승(畵僧)이다. 금용 일섭(金容日燮)은 보응의 제자로 조선 말기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고, 주로 사찰의 예배용 존상(尊像)을 제작하였으며, 불상뿐 아니라 불화(佛畵), 단청(丹靑), 개금(改金) 등 여러 불교미술 분야에서 활약한 근현대기의 화승이다.
보응, 일섭, 석성은 입찰 제출 작품의 조성 직후, 금산사 미륵전 좌협시보살(左夾侍普薩)의 수리를 함께 행하였으며, 1936년 안양암(安養庵) 불사에서도 천오백불전(千五百佛殿) 삼존불(三尊佛) 및 천오백불상(千五百佛像)을 함께 조성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이들이 한 공모전에서 경쟁했다기보다 그룹을 이루어 함께 작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승 보응이 불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나, 후에 일섭의 입찰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일섭이 수화사(首畵師)로서 불상을 조성하였던 듯하다.
공모전은 1m 높이의 축소모형을 제작해서 금산사에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공모전 결과 김복진(金復鎭)의 작품이 발탁되었고, 탈락한 일섭의 불상은 같은 해 10월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의 불교당으로 이안(移安)하였다가, 1941년 3월 제주도 운수당(運壽堂) 백양교당(白羊敎堂)으로 옮겨 개금하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제주 정광사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모셔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미륵상 대좌(臺座) 안쪽에 있는 묵서(墨書)와 일섭의 작업일지인 『연보』를 통하여 확인된다.
여래입상의 높이는 101㎝이고, 대좌를 포함한 높이는 119.5㎝이다. 나무로 기본틀인 목심(木心)을 세워 전체 윤곽을 잡고, 그 위에 흙을 바르고 삼베를 감은 뒤, 위에 도금(鍍金)을 하여 완성한 소조(塑造) 기법의 불상이다.
불상과 대좌는 분리되며, 현 대좌는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 형태인데 정광사에 불상을 모실 때 새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대좌 안쪽에 옛 대좌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판이 끼워져 있고, 이 판에 묵서가 적혀 있다.
여래입상은 승기지(僧祇支), 부견의(覆肩衣), 대의(大衣), 군의(裙衣)를 모두 걸친 조선 후기 불보살상(佛菩薩像)의 착의(着衣) 형식을 잘 보여준다.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肉髻)에 정상계주(頂上髻珠)만 표현하였고, 가는 눈에 얇은 입술로 미소 짓는 온화한 표정을 보인다.
왼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오른손은 허벅지 근처로 내려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을 결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手印)은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금산사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의 수인과 유사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몸은 가슴이 평평하고, 몸에 걸친 옷자락 주름을 두껍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감추고 있다. 부견의가 오른쪽 어깨 및 가슴 부분에서 아래로 늘어져 복부 중앙에서 대의 속에 삽입되면서 큰 U자형 주름이 향좌 측으로 치우치며 아래로 내려오고, 다리 부분에 표현된 대의의 옷 주름과 함께 2단의 U자형을 이루는 모습이다. 이러한 부견의와 대의의 옷 주름 형태는 이후 일섭이 조성하는 불보살입상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요소이다.
가슴에 승기지를 고정한 띠 매듭이 보이고, 띠 매듭 윗부분의 주름을 꽃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금산사 미륵전 좌협시보살상과 유사한 형식 및 양식을 보여서, 일섭이 입찰에 제출할 상을 제작할 때에 전통적인 예배용 존상으로서 불상의 모습을 중요시 하고, 금산사 미륵전에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좌우 협시보살(夾侍普薩)과 조화를 고려하여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섭은 호남 출신으로 전북지역의 사찰에서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또한 입찰 전인 1930년 금산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주존(主尊)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소실 전의 상을 여러 번 실견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 정광사 소조미륵여래입상은 대좌의 묵서와 일섭의 『연보』 기록을 통해 조성 시기와 조각승, 조성 동기 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일섭의 불상 양식 연구와 근대 불교 조각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근대 조각가 김복진의 불상과 더불어 금산사 미륵전 불상 제작에 공모한 작품으로, 전통적으로 불교 조각승들이 제작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서양식 교육을 받은 근대 조각가와 전통 조각승들이 함께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예이다. 2014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