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사에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2014년 8월 행해진 복장(腹藏) 조사에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와 「개금중수기(改金重修記)」, 복장을 넣은 후령통(喉鈴筒)과 다라니(陀羅尼) 등이 발견되었다.
「불상조성기」는 가로 66.6㎝, 세로 33.2㎝의 크기로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원래 대둔산 묘련암에 봉안하기 위해 1649년에 당대 최고승 각성을 필두로 태능 등이 참여하였고, 조각승 무염을 비롯하여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모두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완성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개금중수기」는 가로 22.7㎝, 세로 33.2㎝의 크기로 보살상(菩薩像)을 1907년 경기도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불암사 만일회(萬日會) 수월도량(水月道場)에 봉안하기 위해 개금 중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1649년에서 1907년까지의 어느 시기에 보살상은 전라도 완주 묘련암에서 경기도 양주로 이안(移安)되었고, 늦어도 20세기 초에는 현재 소장처인 불암사에 봉안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개금중수기」에는 보살상 외 다른 한 구의 관음보살상이 함께 개금, 중수되었음도 밝히고 있다.
보살상의 바닥에서도 묵서(墨書)와 주서(朱書)로 된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묵서에는 “화주덕인화원무염묘(化主德忍畵員無染妙)”라는 명문이 있어, 이 상을 무염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주서로 “순치육년기축(順治六年己丑)”이라고 적혀 있어서 1649년에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조각승(首彫刻僧) 무염은 17세기 전반부터 중반에 걸쳐 활동하였고, 가장 큰 조각승 유파인 무염파(無染派)를 세우고 이끈 조각승이다. 무염과 함께 불상을 조성한 불사에 참여하였던 유파 소속의 조각승들은 80여 명에 달하며, 활동 범위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등까지 미쳤다.
무염이 제작한 불상은 1633년(인조 11)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을 비롯해서, 1635년(인조 13)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세불좌상, 1656년(효종 7) 완주 송광사 나한전 석가삼존상과 십육나한상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 67㎝의 단아한 규모에 머리에는 연꽃과 불꽃 문양이 투조와 양각기법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썼다. 얼굴은 이마가 넓고 턱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는 얼굴형을 보인다. 가느다란 눈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원만한 인상이다.
가슴에 대의(大衣) 안에 수평으로 입은 승기지(僧祇支)가 보이고, 오른쪽 어깨와 가슴을 가리고 있는 부견의(覆肩衣)는 아래로 늘어져 복부 중앙에서 대의 속에 삽입되었는데, 삽입되기 직전 꺾인 주름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가슴에는 화려한 영락(瓔珞) 장식 세 가닥이 승기지 위로 드리워져 있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阿彌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였는데, 왼손을 들고, 오른손은 내린 모습이다. 1650년대를 전후로 하여 무염이 제작한 작품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복장 조사에서 발견된 「불상조성기」와 「개금중수기」, 보살상의 바닥에서 발견된 묵서와 주서로 된 명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 시기와 봉안처, 조각승, 화주(化主), 시주질(施主秩) 및 중수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사와 문화사에 매우 중요하다.
또한, 1649년의 제작 연도를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조형성이 뛰어나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조선 후기 불교 미술사 및 17세기 가장 큰 조각승 유파인 무염파 조각승들의 계보와 활동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10월 30일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