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장 ()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사리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사리
조각
개념
불상과 불화 내부에 안치하는 사리ㆍ보화ㆍ경전 등의 종교적 물목. 불복장.
이칭
이칭
불복장(佛腹藏)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복장은 불상과 불화 내부에 안치하는 사리·보화·경전 등의 종교적 물목이다. 복장 물목의 핵심은 후령통으로 그 안에 사리를 비롯해 오곡, 오보 등의 물품을 넣는다. 후령통 외에도 각종 다라니를 적은 진언과 경전 등도 들어간다. 불상에 복장을 넣는 방식은 고려 시대에 정립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복장 물목과 그 상징성 및 의식 절차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조상경』에 수록되어 전한다. 복장 물목은 복장 의식을 통해 생명력을 가지며 성물로서 신성성을 가진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 등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복장 문화를 형성하였다.

정의
불상과 불화 내부에 안치하는 사리ㆍ보화ㆍ경전 등의 종교적 물목. 불복장.
개설

불교에서 예경 대상으로 모셔지는 불상불화에는 생명력과 신성성을 상징하는 종교적 물목이 불상 내부와 불화 복장낭에 안치된다. 복장 물목의 핵심은 후령통(喉領筒)으로, 그 안에는 사리를 비롯해 오보병(五寶甁), 오곡(五穀), 오보(五寶), 오약(五藥), 오향(五香) 등 오방과 세상에서 얻어지는 진귀한 물품들이 들어간다. 후령통 외에도 각종 다라니를 적은 진언(眞言)과 경전, 비단 천을 비롯한 복식 등이 들어가는데 이를 통칭하여 복장이라 한다. 이러한 복장 물목은 복장 의식을 통해 생명력을 가지며 성물로서 신성성을 가진다.

복장을 안립(安立)하는 방식은 고려시대에 정립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복장 물목과 그 상징성, 각종 진언,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의식 절차는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간행된 복장 의식집인 『조상경(造像經)』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전한다. 『조상경』의 내용은 후령통에 들어가는 각종 물목과 진언을 포함해 후령통 외부에 놓이는 진언, 문서류, 그리고 황초폭자(黃綃幅子)를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로 복장의 중심은 후령통에 집중되어 있다. 그 외 불상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다라니와 경전, 복식 및 천 등은 복장이란 관점에서 보면 후령통을 고정하고 내부를 채우는 충전재 역할을 하지만 불상을 제작할 당시 납입되었기에 그 역사성은 상당하다. 이런 이유로 복장으로 출토된 발원문을 포함해 다라니와 경전, 복식과 직물 등은 미술사를 비롯하여 서지학 및 복식사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서 학술적 의미와 국가유산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불상에 복장을 언제부터 넣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간다라 불상과 중국 초기 불상의 정수리에 사리(舍利)를 안치하는 작은 구멍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이른 시기부터 부처님과 같은 신위력을 부여하려는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 대좌 밑에 사리호를 안치한 사례가 있어 이러한 인식이 인도와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복장이란 말 그대로 불상 뱃속에 다양한 물목을 납입하는 것의 시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당(唐)의 문헌에 따르면, 성도(成都) 실상사(實相寺)의 불상에 오장육부의 모형을 납입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실제 일본 세이료지[淸涼寺]에 소장되어 있는 북송(北宋)의 「목조석가여래입상」(985)에서 오장육부의 모형이 발견되었다. 같은 시기 요(遼)에 건립된 응현 불궁사(佛宮寺) 목조오층탑의 「소조여래상」에서는 부처 치아, 수정, 후령을 비롯하여 각종 경전과 불화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내용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복장을 납입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펴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배 안에 있던 진장(珍藏)이 오랑캐로 인해 없어지자 옛 복장에 의거해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 오색실과 금낭(錦囊) 등을 갖춰 완전하게 복원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실제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에서도 이와 유사한 복장 물목이 발견되었다. 현재 고려 후기 불상 복장은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274 이전 조성),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1301),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1346), 「자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388),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389 개금), 안정사 금동여래좌상(고려 후기) 등이 알려져 있다.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복장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봉과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목에는 작은 방울인 후령(後鈴), 가슴에는 목합(木盒), 복부에는 발원문과 문서류, 맨 아래에는 비단천, 그리고 주변에 다라니 뭉치를 놓는 납입 방식이 확인되었다. 또한 문서류 중 복장 입물색(腹藏入物色)에는 심주, 후령, 사리통, 팔엽통, 황폭자(黃幅子)를 비롯해 오향, 오보, 오약 등 복장의 세부 물목이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이 기록은 실제 복장 물목과 일치한다. 이 밖에 목합에서는 진심종자(眞心種子)와 다섯 방위에 맞춰 방형, 삼각형, 원형, 반월형, 원형의 모양을 낸 오방경에 오륜종자(五輪種子)를 적은 진언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고려 후기에는 불상에 후령, 목합, 발원문, 다라니 등을 위치에 맞게 납입하고 목합에는 오향, 오보, 오약 등의 세부 물목을 넣고 진심종자와 오륜종자의 진언을 표기하는 복장 형식이 정례화되었다.

고려시대에 체계화된 복장 물목과 안립 체제, 납입 방식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복장의 물목과 절차 및 진언 등 복장에 관한 모든 내용과 의식을 정리한 『조상경』이 간행될 정도로 규범화되었으며 그 납입 대상도 불상만이 아니라 불화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상경』은 용천사본(1575)을 시작으로 능가사본(1677), 화장사본(1720), 김룡사본(1746), 유점사본(1824) 등이 간행되었다. 시기에 따라 『조상경』에는 불상과 불화에서 나타나는 후령통의 형태를 비롯하여 물목 및 진언이 생략되거나 추가되는 등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조선시대 복장의 가장 큰 변화는 후령통의 명칭과 외형 변화이다. 고려시대에 오보, 오향, 오곡, 오약 등을 담았던 팔엽통(八葉筒)은 조선시대에 팔엽후령통(八葉喉領筒)에서 후령통으로 변하였으며, 형태도 합에서 몸체가 긴 원통형에 뚜껑에 긴 관이 솟은 모양으로 변화하였다. 형태 변화는 1490년에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내부에 안치된 후령통에서 확인된다. 납입 당시 모습 그대로 출토된 이 후령통은 두 겹의 황초폭자에 싸여 있으며 근봉지(謹封紙)로 봉해져 있었다. 황초폭자에는 오륜종자의 범자가 오방에 맞춰 적혀 있고 두 겹의 황초폭자 사이에는 발원문과 보협인다라니(寶匧印陀羅尼)가 놓여 있다. 후령통은 원통형의 몸체에 뚜껑은 볼록하고 그 중앙에 긴 관이 솟아 있다. 이 긴 관은 후혈(喉穴)로 고려시대 목합에서 볼 수 없던 구조이다. 해인사 후령통에서 후혈은 오색의 비단천이 감겨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후령통 안에 들어 있는 오보병을 감싼 오색실이 이 후혈을 통과해 외부로 나와 후령통 외부에 놓인 사방경을 감싸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황초폭자로 감싸던 후령통의 외부 물목에 변화가 일어났다. 후령통 밑에는 열금강지도(列金剛之圖)가 놓이고 위에는 팔엽대홍련지도(八葉大紅蓮之圖)와 준제구자천원지도(准提九字天圓之圖)를 두어 후령통을 감싸는 절차가 복잡해졌다. 또한 불상과 다르게 불화의 경우 방통형 후령통이 등장하였다. 이는 불화의 장황 방식이 족자에서 액자로 변하면서 불화 후면에 납입하기 적합하게 변형되면서 생긴 결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문수사 지장시왕도」(1774)와 「관음사 현왕도」(1811)처럼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화의 복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1824년에 간행된 유점사판 『조상경』에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복장의 절차로 전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불상에 복장을 납입하는 방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부터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발견되는 복장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복장 문화를 형성하였다. 사리를 중심으로 각종 산물을 오방에 대입하여 체계화된 복장 물목은 후령통을 중심으로 변화 발전하였으며, 이 불교 사상과 지식은 『조상경』에 집대성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후령통과 함께 안립되는 각종 다라니와 경전, 복식 및 천 등은 그 시대의 불교 지식과 기술력이 함축된 최고품으로, 한 시대의 문화 역량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처럼 복장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불교 사상과 지식을 함축하고 있으며 문화사적으로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반영된 문화 유산이다.

참고문헌

『조상경(造像經)』(용천사판, 1575: 능가사판, 1697: 화장사판, 1720: 김룡사판, 1746: 유점사판, 1824)
『불복장에 새겨진 의미』(태경 역음, 양사재, 2008)
「우리나라 불복장의 특징」(이선용, 『미술사학 연구』 289, 2016)
「조선 후기 불화 복장 연구」(이용윤, 『미술사학 연구』 289, 2016)
「고려시대 불복장의 특징과 형성 배경」(정은우, 『미술사학 연구』 286, 2015)
「불복장물 구성 형식에 관한 연구」(이선용, 『미술사학 연구』 261, 2009)
집필자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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