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필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영성 운동을 전개한 개신교인이자 교육자이다. 1913년 출생하여 1964년 사망하였다. 1927년 화순군 천태산에서 도생활을 하던 이세종을 찾아가 5년간 성경 공부를 하였다. 1940년 화순군 산중에 들어가 2년 넘게 ‘1일1식(一日一食)’, 맨발 독수도(獨修道)하면서 깨우친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현필은 탁발과 노동을 하면서 순결(동정)과 청빈, 순명을 추구하는 수도 공동체 운동을 지도하였다. 1977년 『맨발의 성자 이현필전』이 출판되면서 ‘한국의 프란체스코’, ‘맨발의 성자’란 칭호를 받기 시작하였다.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농부 이승로(李承老)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12세 때 돈을 벌기 위해 나주 영산포로 갔다가 그곳에서 대서업을 하던 일본 무교회주의 신도 스가나미〔管波〕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영산포에서 2년 정도 스가나미가 인도하는 무교회 집회에 참석하다가, 1927년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에서 청빈과 순결, 순명의 수도생활을 하던 이세종을 찾아가 5년간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곳에서 만난 최흥종 목사의 소개로 1932년 광주로 나와 에비슨(G. W. Avison) 선교사의 농업실습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강순명 전도사의 독신전도단 단원이 되었으며, 여선교사 쉐핑(E. J. Shepping)이 지도하는 확장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1934년부터 광주 신안동 재매교회 전도사로 2년간 사역하였고, 1936년 상경하여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야간부 영어 학교에서 2년간 수업을 받기도 했다. 1938년 결혼하였으나 결혼 2년 만에 부인(황홍윤)이 사산(死産)한 것을 계기로 “동정을 지키라.” 했던 스승 이세종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해혼(解婚)’을 선언한 후 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현필은 1940년 출가하여 화순군 도암면 청소골에 들어가 산중에서 기도와 성경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2년 넘게 ‘1일 1식(一日一食)’, 맨발로 독수도(獨修道)하면서 깨우친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일제 말기 교권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든 기성 제도권 교회, 특히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하면서 신앙의 지조를 잃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실망한 교인들은 이현필의 ‘성경중심’ 영성과 실천에 감동하였다.
이에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서 수도생활을 시도하는 ‘제자’들이 생겨났다. 이세종 문하에서 함께 성경을 공부했던 손임순과 오복희, 남원읍 삼일목공소에서 은밀하게 신앙집회를 하던 오북환 집사와 서재선, 강남순, 강화선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도 출가하여 남원과 화순, 곡성 등지 산중에 들어가 노동과 기도, 성경공부에 전념하였는데, 기성교회 교인들은 이들을 ‘산중파(山中派)’라고 불렀다.
해방 후 이현필은 1946년 광주 양림동 기독교청년회관과 양림교회 유치원에서 고등농민학원과 양영원(養英園) 교사로 봉직하면서 그동안 남원 지리산 서리내와 갈밭에서 가르치던 10대 제자들을 광주로 이주시켰고, 1949년 방림동과 봉선동에 집을 마련하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0년 1월 최흥종과 김천배, 정인세 등 광주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동광원(東光園)이란 명칭의 고아원을 설립하고, 제자 김준호와 정귀주로 하여금 고아들을 돌보게 하였다. 또한 1951년 걸인과 빈민을 구제하는 귀일원(歸一園), 1956년 말기 결핵환자를 돌보는 송등원(松燈園)을 설립하여 제자들에게 맡겼다. 이후 동광원을 비롯하여 귀일원, 송등원은 사회복지 기관과 수도공동체로서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현필은 해방 후 사회복지 기관 설립에 관여하였지만, 그의 궁극적 관심과 목표는 수도생활이었다. 그는 광주 동광원 외에 남원과 화순, 곡성, 순천, 함평, 나주, 해남, 진도, 경기도 능곡과 벽제에도 제자들을 분산시켜 탁발과 노동을 하면서 순결(동정)과 청빈, 순명을 추구하는 수도공동체 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현필은 1955년부터 앓기 시작한 후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극기와 금욕의 수도생활을 실천하였고, 광주 동광원과 지방 분원들을 돌면서 제자들을 지도하다가 1964년 3월 18일 새벽, 계명산 벽제분원 토담집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제자들에 의해 동광원과 귀일원은 계속 유지되었고, 1977년 엄두섭 목사의 『맨발의 성자 이현필전』이 출판되면서 ‘한국의 프란체스코’, ‘맨발의 성자’란 칭호를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