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南浦) 또는 금강진(錦江津)이라고도 하였다.
영산포의 주변 자연환경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위로는 별봉산(168m)과 냉산(182m), 대포리봉(182m) 등이 있다. 영산강 아래로는 개산(189m), 노봉산(55m) 등이 있다. 최초 일본인 정착지 오른쪽으로 새끼내가 흐른다.
영산포가 있었던 지역 중에서 영산포의 중심지적 기능을 지녔던 곳은 영산동이다. 조선 초기에는 영산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주변 남부지방의 전세(田稅)를 거두어 이곳에 있던 영산창(榮山倉)에 모았다가 서울로 다시 운반하는 구실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 이 기능이 영광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겨짐에 따라 영산창은 폐지되었다.
영산포의 조운(漕運)에 이용되던 기능은 상실되었으나, 이곳이 수운에 적당하여 주변지역 산물의 집산지 및 거래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지속되었다.
영산포쪽이 주요 포구가 된 것은 목포가 개항되고 일본인 미곡상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당시 영산강 유역의 주요 하항은 영암의 덕진포와 와우포, 무안의 사포와 학교, 함평의 고포원, 나주의 석포와 제창 및 영산포 등이었다. 1904년 동력선의 출항으로 목포와 영산포간의 운항시간이 단축되었고 결과적으로 영산포는 크게 번영하였다.
영산포의 시가지는 1910년 이전에 시장통을 중심으로 최초의 거리[町]인 元町 형성되기 시작했고, 교통로의 발달과 더불어 시가지는 날로 발전하여 밀집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14년 한국인은 2,140명, 일본인은 857명이 거주하는 통계연보가 이를 증명한다. 일본인들이 조성한 산업도시가 되면서 1914년영산포는 호남선 철도와 통행료를 받는 목교가 준공되었다. 나주와 영산포구간의 침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제강점기에는 영산포의 물목부를 넓혀 홍수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하천 개수공사가 시행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는 포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철도교통과 도로의 건설에 의한 교통의 발달과 토사퇴적의 증가는 영산포의 하항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하였다. 현재는 이곳에 설치되어 운영되었던 등대마저도 폐쇄되었으나, 이 등대는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영산현, 후에 영산군에 속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나주목(羅州牧)에 속하였다. 1904년에는 이 지역이 나주군 지량면(知良面)과 상곡면(上谷面)으로 나누어졌으나 합하여 양지면(良知面)이 되었다. 1927년영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나주군 나주읍과 병합하여 금성시가 되었고 1986년나주시로 변경되었다.
영산포는 과거의 수운 기능은 상실했지만, 호남선과 여러 국도 · 지방도 등이 이 지역을 지나고 있어 육상교통의 주요지역이며 교통요지로서의 기능은 현재도 수행하고 있다.
옛 영산포 선창에서 정미소 거리까지 7백50여 미터에 당시 형성된 시가지 모습과 일본식 가옥, 상가 등 1백여 채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경관은 지역 사람들의 문화, 생활 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지역의 자산이 되고 있다. 1950년 이전에 건축된 일식상가건물, 주거건물, 정미소건물, 창고 등이 있어 과거를 느낄 수 있지만 그 근대 건축물도 최근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황산포 주변은 홍어로 유명하다. 신안이나 목포 등에서 실은 홍어가 영산포에 이를 때쯤 맛이 제일이라 이곳에 홍어집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먹거리를 간직한 영산포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