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가 초년에 어떤 글씨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모친 신사임당의 영향이 가장 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우가 초년에 사임당의 서풍을 따랐을 것이라는 추정에 부합하는 필적이 「귀거래사」를 쓴 ' 초서 귀거래사'이다.
원래는 17매로 된 글씨 첩(帖)이었던 것을 열 폭의 병풍으로 고쳐 꾸몄다. 끝부분에 "병진년 늦은 봄에 옥산이 비슷하게 쓰다[丙辰暮春 玉山書似]."라고 적혀 있어 이우가 15세 되던 1556년(명종 11)에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문장에서 "비슷하게 썼다"는 말은 어떤 모범이 되는 필적을 보고 유사하게 따라 썼다는 뜻인데, 과연 모범이 된 필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우의 나이로 보아 모친의 필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필적을 신사임당의 전칭작 「초서 당시오절(唐詩五絶)」(3종)과 비교해보면 자형 · 획법 · 운필에서 유사성이 뚜렷하여 이러한 짐작을 뒷받침해 준다.
원래는 17매로 된 글씨 첩이었던 것을 10폭의 병풍으로 고쳐 꾸몄다. 마지막 10폭에 후대인이 쓴 한문, 한글 발문이 각각 1점씩 첨부되었다.
옥산 이우의 초년기 서풍과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의 영향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