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李瑀, 1637~1693)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 · 죽와(竹窩) · 기와(寄窩) 이다. 어머니는 신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동생이다. 어려서는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으로부터 글씨를 배웠고 성장해서는 당대의 초서 명필이던 장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영향을 받았다.
신사임당의 서화는 7남매 중 맏딸 매창(梅窓)과 막내 아들 이우 그리고 손녀 이부인(李夫人) 등 3대에 이어졌으며, 특히 이우는 당대 초성(草聖)으로 지칭된 황기로(黃耆老)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 병풍은 주1의 주2」를 초서체로 쓴 것으로 그의 나이 15세에 썼다.
이우가 초년에 어떤 글씨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모친 신사임당의 영향이 가장 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우가 초년에 사임당의 서풍을 따랐을 것이라는 추정에 부합하는 필적이 「귀거래사」를 쓴 ' 초서 귀거래사'이다.
원래는 17매로 된 글씨 첩(帖)이었던 것을 열 폭의 병풍으로 고쳐 꾸몄다. 끝부분에 "병진년 늦은 봄에 옥산이 비슷하게 쓰다[丙辰暮春 玉山書似]."라고 적혀 있어 이우가 15세 되던 1556년(명종 11)에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문장에서 "비슷하게 썼다"는 말은 어떤 모범이 되는 필적을 보고 유사하게 따라 썼다는 뜻인데, 과연 모범이 된 필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우의 나이로 보아 모친의 필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필적을 신사임당의 전칭작 「초서 당시오절(唐詩五絶)」(3종)과 비교해보면 자형 · 획법 · 운필에서 유사성이 뚜렷하여 이러한 짐작을 뒷받침해 준다.
원래 17면의 서첩(書帖)이던 것을 병풍 9폭에 개장(改粧)한 것으로 그 가운데 13면은 세로 42㎝이고 나머지 4면은 세로 34㎝로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의 크기는 23.5∼25.5.㎝로 대차가 없다. 제10폭에는 안동인 김순동(金舜東)이 1965년에 쓴 발문이 있다.
옥산 이우의 초년기 서풍과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의 영향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