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형(金宇亨)의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도상(道常)이며, 호는 기오재(寄傲齋)다. 1650년(효종 1) 문과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호조참판, 도승지, 한성판윤, 경기감사, 공조판서를 지냈다. 글씨에 능하였고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써서 여러 번 왕실의 보책(寶冊)을 썼다.
김우형 필적은 그간 몇몇 간찰과 비문(碑文)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이 서첩을 통해 명필로서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첩의 기사를 통해 개성유수 재임 시절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 글씨 앞뒤로 그가 별도로 쓴 글에는 "1687년 5월 하순에 쓰기 시작하여 그해 8월 하순에 삼절헌(三節軒)에서 마쳤다."고 하여 필사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서첩 앞표지에 자신의 호를 딴 "기오재희묵(寄傲齋戱墨)"이란 제목이 쓰여 있다. 서첩은 총 36장으로 두보(杜甫) · 왕유(王維) 등 중국 당나라 유명 시인의 시를 송설체(松雪體) 서풍의 행서와 초서로 썼다. 또한 김우형의 개인 인장 15과가 서첩의 곳곳에 찍혀 있어 17세기 인장(印章) 연구의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총 36장의 서첩 형태로 장황하였다.
정치인이자 문신으로 알려진 김우형의 명필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주는 중요 서첩으로, 17세기 조맹부체의 유행과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집으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필사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17세기 서예 작품으로 국가유산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2014년 7월 8일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수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