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 서결(書訣)』 중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내용을 반박한 글이다. 행서로 썼으며 서첩으로 장황되어 있다. 맨 앞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제목을 써놓았다.
‘원교필결(員嶠筆訣)’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광사 필 『서결』을 가리킨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결』 중 모두 아홉 가지 내용을 들어 비판했으며, 마지막에는 운필법(運筆法)과 선본(善本) 학습에 대한 제안을 하였다. 조목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붓을 뉘어 쓰는 언필(偃筆)의 폐해를 지적한 것에 대해 묵법(墨法)에 대한 영향은 한마디도 없고 필법(筆法)만을 갖고 논한 것을 비판하였다.
둘째, 획을 시작할 때 붓털을 펴서 날카로운 칼로 자른 듯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셋째, 붓을 단단하게 다지는 축필법(築筆法)이 본래의 의미와 방법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비판하였다.
넷째, 붓이 앞서고 손이 뒤 따른다[筆先手後]는 주장에 대해 선후가 뒤바뀐 점을 비판하였다.
다섯째, 점을 찍는 법[點法]에 있어 형태는 뾰족하되 붓털은 펴지게 한다는 주장의 모순됨을 비판하였다.
여섯째, 네모반듯하고 가지런한 결구(結構)를 비판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당(唐)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顏眞卿)의 글씨를 거론한 것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일곱째, 이광사가 자신의 주장을 왕희지의 여러 서첩과 결부시킨 것에 대하여 현존하는 왕희지 서첩이 대부분 위작이며 진안(眞贋)이 뒤섞인 것이라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여덟째, 이광사가 한예(漢隷)의 품제(品第)를 다루며 예기비(禮器碑)를 최고로 친 것에 동의하면서도 수선비(受禪碑)를 함께 거론한 것을 비판하였다.
아홉째, 이광사가 천품은 뛰어났으나 배움이 없었다고 한 뒤, 고금 법서(法書)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하고 대가(大家)에게 배우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결』의 내용에 대해 아홉 조목을 들어 지적하는 한편, 마지막에는 앞서 거론한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봉(中鋒)과 역필(逆筆)에 의한 운필법, 그리고 당비(唐碑)의 선행 학습을 통해 왕희지 고법(古法)으로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표지에 "완당시병완(阮堂試病腕)"이라고 쓴 제첨(題簽)이 있다. 24면에 걸쳐 글씨가 쓰여 있고, 서첩 말미에 김정희의 수묵산수(水墨山水) 3점이 함께 실려 있다. 각 면의 크기는 세로 23㎝, 가로 9.1㎝이다. 곳곳에 “중봉(中鋒)” 인장이 찍혀있고, 앞뒤로는 "현비(懸臂)", "원정사(元貞士)", "완당(阮堂)", “곡인(穀人)” 인장이 찍혀 있다.
조선 후기 서예 이론서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이광사의 『서결』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논박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청조(淸朝)의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비학(碑學)의 이론을 섭렵했던 김정희의 시각으로 볼 때 이전 세대인 이광사의 이론적 체계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18년 6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