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업사지는 과거 ‘죽산리사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1966년 오층 석탑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奉業寺) 터임이 확인되었다. 『고려사』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천(南遷)하였다가 환도할 때 죽주(竹州, 현재 죽산)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眞影)을 알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봉업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화차사(華次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며 고려 광종 대에 봉업사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중창(重創)이 이루어져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번성하였고 조선 전기에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봉업사는 신라 말 고려 초 때 죽주 지역의 토착 세력인 박기오(朴奇悟) 등 죽산 박씨 뿐만 아니라 후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호족이자 태봉과 고려의 건국자인 기훤(箕萱) · 궁예(弓裔) · 왕건(王建)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운영되었다. 즉 봉업사는 이 지역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기훤 · 궁예 등에 의해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되었고,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궁예의 지지 기반이었던 청주 세력을 비롯하여 이곳 죽주 지역의 호족들을 견제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청주의 호족 출신으로 고려의 개국에 기여한 능달(能達)을 파견하였고, 그는 봉업사를 중심으로 불사를 일으키며 지역적 안정을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광종 대에는 죽주 지역이 서원경과 중원경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통한 개혁 정책을 수행하는 데 군사적 · 종교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봉업사는 태조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사원로 중창되고 국가 경영의 중심 사찰이 되었을 것이다.
봉업사지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3차례, 2018년 1차례 등 모두 4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1~3차 발굴 조사에서 목탑지, 금당지, 진전지 등 건물지와 담장, 석탑 하층 기단, 범종 제작 시설 등 다수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굴 결과에 의하면 봉업사지의 사역은 현재 오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 곳이 중심 권역이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200m 떨어진 구역,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죽산리 삼층 석탑이 위치한 구역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오층 석탑 북쪽에서 통일신라시대 목탑지가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탑지는 봉업사 중창 당시 현재의 오층 석탑이 건립되면서 금당으로 중창되어 오층 석탑-추정 금당지-추정 강당지가 동일선상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강당지 동쪽 구역은 생활 및 거주를 위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층 석탑 북쪽 구역에서는 대부분 고려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죽산의 고구려 때 지명인 ‘개차(皆次)’명, 고려 때 지명인 ‘죽주’명, 고려 초기 청주 호족이었던 ‘능달’명 등 50여 종의 광종~ 성종 대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목탑지에서는 100여 점의 소조불상 의습과 나발 편이 수습되었다.
오층 석탑에서 북서쪽으로 200m 떨어진 지점에서는 7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사역의 서쪽에 있으며 온돌 시설이 없는 구조와 장대석의 사용 등으로 보아 봉업사에 있었던 진전과 관련된 구역으로 추정되었다. 이 구역 건물지에서는 화차사 명이 새겨진 8~9세기의 기와와 ‘대중(大中) 8년(854)' 명 기와가 출토되어 봉업사 이전 통일신라시대에 화차사라는 사찰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준풍(峻豐) 4년(963)’, ‘건덕(乾德) 5년(967)’명 기와가 수습되어 광종 대에 봉업사의 연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죽산리 삼층 석탑 주변에는 추정 금당지와 추정 중문지 등 6개의 건물지와 담장 석렬, 범종 주조 유구, 삼층 석탑 하층 기단 등이 확인되었다. 건물지 배치는 추정 중문지-삼층 석탑-추정 금당지로 이어지는 형태이며 오층 석탑 일대의 건물지 축선과 일치한다. 건물지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고려시대로 확인되었다. 죽산리 석탑 하층 기단 하부에서 ‘태화(太和) 6년(832)’명 기와가 출토되어 현재 남아있는 석탑 이전에 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삼층 석탑 남쪽에는 범종의 주형(鑄型) 유구와 용해(溶解)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중창 당시 사찰 내에서 범종을 주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발굴 조사 결과 봉업사는 통일신라시대에 화차사가 조성되어 있었고 고려 광종 대에 봉업사로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오층 석탑 일대를 중심으로 죽산리 삼층 석탑이 위치한 지역까지 사역이 확대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지는 여러 층으로 중복되거나 교란되어 있고 유물의 시기도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있어 중창 이후에도 가람 배치가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4개소의 건물지와 범종 주조 유구, 700여 점에 달하는 명문 기와를 비롯한 다수의 기와와 막새, 청자, 중국 자기류, 불구류 등이 출토되어 사세(寺勢)가 상당했음을 보여 준다.
봉업사지는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고려 태조의 진영을 봉안했던 사찰터로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수의 건물지와 높은 수준의 출토 유물로 보아 봉업사는 지역 토착 세력과 왕실의 후원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봉업사지는 고려시대 불교 문화는 물론 고려 중앙 권력과 지방과의 관계, 죽산 지역의 역사적 전개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