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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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창설에 역할을 담당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2년
사망 연도
1950년
출생지
평안북도 구성(龜城)
주요 경력
한국광복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전태산은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나 1935년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6년 이청천(지청천)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창설에도 참여하였으며, 한국광복군 창설 시 현장에 있었다. 1942년 4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하여 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창설에 역할을 담당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전태산(全泰山)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다.

주요 활동

전태산은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6월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하였다. 뤄양군관학교는 1933년 김구와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蔣介石〕의 협의로 개교하여 만주 지역뿐만 아니라 베이징 · 상하이 · 톈진 등지의 한인 청년들도 받아들였다. 뤄양군관학교의 운영과 교육훈련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에게는 휴가나 외출이 통제된 채 교육이 실시되었다. 훈련 과목은 전술학, 병기학, 통신학, 정치학, 무술, 검술, 사격, 체육 등이었다.

1936년 난징〔南京〕에서 지청천(池靑天, 일명 이청천)의 휘하에서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창설에 참가하였다. 청년공작대는 결성 과정에서 김구의 승인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조직체였다. 대장은 고운기(高雲起)였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년공작대원은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이들을 항일투쟁의 대열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9년 11월 한국광복군 창설 준비 과정에 청년공작대원으로 고운기 · 노복선 · 지달수(池達洙)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군사위원회 위원과 군사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중국의 저명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광복군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창립식에 많은 인사를 초청한 것이나 장소를 서양인이 주로 이용하는 가릉빈관으로 택한 것은 광복군 창설에 대한 선전 효과를 거둔다는 측면은 물론 이에 대한 협조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중국군사위원회 실무진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광복군 성립 전례식은 임시정부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참석 인원은 약 200여 명이었다. 상하이에서 탄생한 임시정부가 20여 년만에 정식 군대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광복군의 탄생은 임시정부 요인뿐만 아니라 관내 지역 한인사회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과의 연합을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과 직결된 군사 활동을 공식적으로 펼칠 수 있다는 점은 고난의 이동 시기를 거친 임시정부가 염원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전태산은 이때 창립 요원으로 지달수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총사령부의 간부 요원으로 임명되어 사병의 모집 및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 필요에 의한 유격전 수행 등의 임무 방안을 세우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1940년 11월 시안〔西安〕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이전할 때 경제부 조원으로 민영구(閔泳玖) · , 지달수와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시안 시내 이부가(二府街) 4호에 총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942년 4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제1구대 제1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편제에 따라 본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8 · 15광복 때까지 항일 활동을 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시준, 『한국광복군 연구』(일조각, 1993)
『독립유공자공훈록』 5(국가보훈처, 198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권, 제6권(고려서림, 198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5(탐구당, 1968)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독립문화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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