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우(李亨雨)는 1890년 충청북도 제천 출신으로, 본명은 이춘우(李春雨)이다.
1908년경 북간도로 망명하여 왕청현(汪淸縣) 대감자(大坎子)에 정착하였다. 1919년 10월경 왕청현에 ‘조선독립’을 표방하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 조직되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때 왕청현의 대한광복단은 김성극‧전성륜 등의 대한정의단이 대한광복단과 군정서로 갈라질 때 대한정의단을 나와 1919년 9월경 공교회원을 중심으로 새로 결성한 단체였다. 이때의 대한광복단은 1919년 3 · 1운동 이후 이범윤(李範允)이 연해주 수이펀〔綏芬〕에서 조직한 대한광복단에 통합되어 왕청현 분단으로 새로이 편성되었다. 당시 이범윤은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의 안도현(安圖縣), 장백현(長白縣) 등지에 항일 무장세력을 기반으로 대한광복단을 조직하며 단체의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920년 이후 광복단장 이범윤 휘하에서 의사원(議事員)으로서 대한광복단의 행정을 담당하였며, 군사훈련 이수 후 교관으로서 군사훈련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이병섭(李炳燮)과 함께 통신원으로서 본부와 각지 지단과 분단 사이의 연락 업무도 담당하였다.
1920년 3월경 중대장 조동식과 함께 독립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연해주 니콜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로 가서 총기 100자루, 권총 20∼30자루와 탄환 등을 구입하였다. 8월에는 전성륜의 지시로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무장 활동을 위한 군자금 약 3천 원을 모금하였다.
1921년 군자금 모금과 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펼치며,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무기 대량 구입에 가담한 사실이 새로이 드러나 이듬해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1925년 7월 출옥 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927년 5월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단원 두 명과 함께 부호들을 찾아가 자신들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이라고 소개하고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누설되어 5월 28일 영흥읍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소지품은 선포문 5장, 브라우닝식 권총 1정, 약간의 탄환 등이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4년에 출옥하였다. 당시 죄명은 일제가 군자금을 모금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흔히 씌우는 ‘강도’ 및 ‘강도미수죄’였다.
1958년 서울에서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