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화는 대한제국기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의병을 일의킨 유생 의병장이다. 소규모의 병력으로 고부·정읍·순창·태인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신보현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일제 군경에 타격을 가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高宗)이 강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해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1908년 3월 수십 명의 병력으로 고부에서 의병진을 조직하였다. 6월에는 정읍(井邑)에서 군자금과 군수물자를 모아 군세(軍勢)를 확장하였다. 이후 고부 · 태인(泰仁) · 순창(淳昌) 등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전을 전개하였으며, 휘하 병력이 많을 때는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성화의 의병 부대는 1909년 1월에는 6회, 2월에는 9회에 걸쳐 일제 군경에 대한 기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제는 2월에만 경찰 단독 5회, 헌병 단독 10회, 수비대 단독 3회, 연합 토벌 3회 등 총 21회나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09년 4월 5일에는 신보현(申保玄)의 의병 부대와 합세하여 순창군(淳昌郡) 가포곡(加布谷) 북방에서 일본군과 1시간에 걸쳐 접전하였고, 5월 1일에는 태인군 인곡면(仁谷面) 괴동(槐洞)에서 전투를 벌였다. 5월 19일에는 고부군 벌말면(伐末面) 대사리(大寺里)에서, 6월 20일에는 고부군 우덕면(優德面) 두지리(斗池里)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이 무렵 일제의 조사에 의하면, 1909년 6월 13회, 7월에는 26회에 걸쳐 일제 군경과 교전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성화의 의병진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던 ‘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것으로 보이며, 1910년 7월까지 소규모의 의진을 유지하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더이상의 의병 활동이 불가능해진 후 병이 들자 이름을 유근일로 바꾸고 전주 서문 밖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사망하였다고 한다.
200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