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빌려서 한국어를 표기하는 것을 ‘차자 표기(借字表記)’라 하고, 차자 표기에 사용된 한자를 ‘차자(借字)’라 한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15세기 중엽 이전의 한국어 표기는 전적으로 차자 표기에 의존하였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문서를 작성하거나 한문 문헌에 구결을 달 때 차자 표기가 널리 이용되었다.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빌려 오는 과정에는 크게 두 가지의 원리가 작용하였다. 하나는 한자의 음(音)을 빌릴 것인지 아니면 훈(訓)을 빌릴 것인지에 관한 ‘음훈(音訓)’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의 본뜻을 살려 쓸 것〔讀〕인지 아니면 본뜻과 무관하게 쓸 것〔假〕인지에 관한 ‘독가(讀假)’의 원리이다.
이 두 가지의 원리를 조합하면 음독(音讀), 음가(音假), 훈독(訓讀), 훈가(訓假)의 네 가지 유형이 나오게 된다. 훈가자는 이 중 네 번째 유형인 ‘훈가(訓假)’의 원리에 의해 사용된 차자를 가리킨다. 즉, 한자의 훈을 빌리면서 그 한자의 본뜻과 무관하게 쓴 차자가 ‘훈가자(訓假字)’인 것이다.
한자의 훈을 빌려 읽되 그 한자의 본뜻과 무관하게 사용하는 훈가자는 (똑같이 훈으로 읽으면서 본뜻도 살려 쓰는) 훈독자에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以’는 한문에서 도구나 방법 등을 표시하는데, 차자 표기에서는 ‘以’의 뜻을 살려서 도구나 방법 등의 의미를 표시하는 조사 ‘-로’를 적을 때 ‘以’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손으로’라는 어절은 ‘手以’〔손으로〕라고 적었고, 여기서 ‘以’〔로〕는 훈독자로 파악된다. 그런데 ‘아울러, 함께’의 의미를 지니는 부사를 표기할 때에는 ‘幷以’〔아오로〕라고 적었으며, 이 ‘幷以’의 ‘以’〔로〕는 도구나 방법 등의 의미와는 무관한 것이므로 훈가자로 파악되는 것이다.
훈가자는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어서 다른 유형의 차자(借字)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은 편이다. 위에 든 ‘幷以’의 예처럼 단어의 끝소리를 적을 때나 문법 형태를 적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문법 형태 표기의 예로는 과거 회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선어말어미 ‘-더-’를 ‘加’로 적은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같은 글자를 훈가자로도 쓰고 음가자로 쓰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加’자를 가지고 의문문의 끝에 오는 ‘-가’의 표기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차자 표기의 용자법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양주동( 『고가연구(古歌硏究)』)은 한자의 본뜻과는 관계없이 그 음이나 훈만을 빌려 표기하는 ‘차자(借字)’의 하위 부류로 ‘음차(音借)’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남풍현(『차자표기법연구(借字表記法硏究)』)은 양주동의 체계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되 ‘차자(借字)’란 용어를 ‘가자(假字)’로 바꾸고 그 하위 부류로 ‘음가자(音假字)’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음가자의 설정은 차자 표기의 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