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찰은 596년 소가씨〔蘇我氏〕의 우지데라〔氏寺〕로서 건립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이다. 587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발원을 계기로, 588년 백제에서 보낸 사공(寺工) · 노반박사(露盤博士) · 와박사(瓦博士) · 화공(畵工) 등의 장인들에 의해 건립공사가 시작되었다. 590년 사찰건립을 위한 목재를 벌목하였고, 592년 금당과 회랑이 완성되었다. 593년에는 탑심초에 불사리를 안치하고 심주(心柱)를 세웠으며, 596년 완공되었다.
가람의 형태는 중앙에 탑을 두고 동 · 서 · 북쪽에 각각 금당을 배치한 1탑 3금당 식의 가람배치로서 고구려 가람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596년부터 고구려 혜자(慧慈)와 백제의 혜총(惠聰)이 이곳에 머물렀으며, 605년에는 고구려의 지원으로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渡來人) 쿠라츠쿠리노 토리〔鞍作止利〕가 장육불(일명 아스카대불)을 조성하여 606년에 금당에 안치하였다.
710년 헤이죠쿄〔平城京〕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이 사찰 역시 718년 현재의 나라시(奈良市)로 이전하여 간고지〔元興寺〕가 되었다. 아스카 지역의 원래 사찰 역시 계속 유지되어 모토간고지〔本元興寺〕로 칭해지다가, 1196년 낙뢰로 인해 탑과 금당이 소실되고 별다른 부흥 없이 사세가 크게 쇠퇴하고 만다. 이후 근근이 법등을 이어 오다가 1825년에 중금당(북금당) 자리에 아스카대불을 모신 현재의 본당이 재건되었고 안고잉〔安居院〕으로 사찰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이라는 점에서 이 절이 갖는 문화사적 위상은 대단히 높다. 특히,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친 일본불교 수용기의 거점사찰로서 한반도 삼국과의 인연이 매우 깊은 곳이기도 하다. 사찰의 가람형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1탑 3금당이며, 사찰 조영을 직접 이끈 전문 인력은 558년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들이었다.
사찰 완성 이후에도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이 이곳에 머물며, 삼보의 동량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일본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또한 605년 본당의 주불을 조영할 때는 고구려에서 황금 300냥의 지원이 있었고, 불상 조영을 주도한 쿠라츠쿠리노 도리는 한반도 출신 도래인의 후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사찰은 고대 한반도 불교문화의 일본 전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현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