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하본은 책판(冊版, 木板)을 판각할 때, 판목(版木)에 뒤집어 붙여서 종이에 비춰 보이는 각 글자의 윤곽대로 새길 수 있도록, 얇은 종이에 진한 먹으로 정서(淨書)한 사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판하본은 목판본을 판각하기 위하여, 정서한 원고를 목판에 뒤집어 붙인 후 종이의 뒷면에 비춰 보이는 글자의 윤곽에 따라 각 글자를 새겨 냄으로써 소멸하게 되지만, 목판본 간행의 원천(原泉)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판하본(版下本)은 책판(冊版, 木板)을 판각할 때, 판목(版木)에 뒤집어 붙여서 종이에 비춰 보이는 각 글자의 윤곽대로 새길 수 있도록 얇은 종이에 진한 먹으로 정서(淨書)한 책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렇게 원고를 최종적으로 정서하여 만들어진 사본(寫本)을 ‘등재본(登梓本)’ 또는 ‘판하본’이라고 한다. 즉, 판하본의 각 장을 각각의 목판에 뒤집어 붙이고, 그 붙인 종이의 뒷면에 비춰 보이는 글자의 윤곽(輪廓)에 근거하여 각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목판을 새김과 동시에 판하본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판하본은 목판본을 새기기 위해 순수한 용도로 정서하여 만들어진 사본을 의미한다. 또한 기존의 간인본(刊印本: 목판본, 활자본)을 해체하여, 해체된 각 장을 목판에 뒤집어 붙여 판하용(板下用)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판하본의 용도로 정서한 고본(稿本)은 판각용 정서고본(板刻用淨書稿本), 판각용 정고본(淨稿本), 상재용 정고본(上梓用淨稿本), 등재용(登梓用) 정고본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고본이 아닌 것을 판하용(版下用)으로 정서한 것은 판각용 정서본 또는 판서본(板書本) 등의 용어도 사용한다.
판하본(版下本)에 대한 사례 중 하나는 고려재조대장경(高麗再造大藏經, 팔만대장경: 해인사대장경(八萬大藏經: 海印寺大藏經))을 판각하기 위하여 대장경의 각 경론(經論)을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정서한 판하본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고려재조대장경을 조조(雕造, 1236~1251)할 당시에, 불력(佛力)의 수호로 몽고[元]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하는 정성을 표시하기 위한 징표로, 8만 1천여 판(板)의 양면(兩面)에 대장경 전체를 치성(致誠)으로 판각하기 위하여, 그 판하본(版下本) 전체를 완전히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새로이 모두 정서하여 마련함으로써 대장경의 판각(板刻) · 조조(雕造)에 임하였다는 사실(史實)이 있다. 고려재조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하여 마련한 판하본이야말로 판하본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한편,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을 해체하여 판하본으로 활용하여 목판인쇄본으로 간행한 최초의 사례는 『남명(법)전화상송증도가(南明(法)泉和尙頌證道歌, 1239)』에서 확인된다. 즉, 당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제1인자였던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 초명 최우(崔瑀), ?~1249)는 목판 인쇄본 남명 증도가의 발문 겸 간기(刊記)에서, “1239년 9월에, 『남명증도가』는 선문(禪門)에 매우 긴요한 책인데 그 전래가 끊겨 유통되지 못함에, 집안에 전래되어 오던 주자본(鑄字本: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南明[法泉和尙頌]證道歌)』를 (해체하여 판본으로 거듭 새겨[重彫] 목판 판각) 간행함으로써 오래 전래될 수 있게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기록은 1211년 무렵에 주조된 금속활자본 『남명송증도가(南明頌證道歌)』를 해체하여 판하본으로 삼아 목판 판각하여 인쇄함으로써, 1239년에 목판인쇄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판하본은 목판본을 판각하기 위하여, 정서한 원고를 목판에 뒤집어 붙인 후 종이의 뒷면에 비춰 보이는 글자의 윤곽에 따라 각 글자를 새겨[刻] 냄으로써 소멸하게 되지만, 목판본 간행의 원천(原泉)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