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8월 10일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봉선(崔鳳仙)이다.
1919년 3월, 의신학교(義信學校) 상급생이었던 그는 교사 김필애(金弼愛) · 박순천(朴順天)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 박순천은 서울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배동석(裵東奭)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고,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인 임학찬(任學瓚)과 3월 21일 구(舊) 마산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최봉선은 의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에게 만세시위 준비 장소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고 함께 태극기 등을 제작하였다.
3월 21일 태극기를 가지고 구 마산 장터로 나갔다. 이날 오후 3시, 개신교 지도자들과 의신학교, 창신학교 학생들이 앞장서는 가운데 2,000~3,0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최봉선은 시위대에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는 저녁 무렵까지 이어지다가 경찰과 마산 주둔 군부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 변호사가 조선 사람은 교육이 필요 없다거나, 도평의회에서 조선말로 통역하는 것을 철폐하자고 주장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에 분노한 김원석(金元錫)이라는 사람이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물리적 충돌을 야기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김기정 발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통영 군민들은 3월 말부터 잇달아 김기정을 성토하는 시민대회를 열었다. 그러자 김기정이 김원석을 비롯한 12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고, 5월 9일 이들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에 군민들은 자발적으로 민정회(民正會)를 조직하고 5월 12일에 시민대회를 열고자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최봉선은 당시 통영유치원에서 보모로 근무하면서 민정회에 참여하여 ‘구금된 사람들이 단식을 한다’는 소식과 앞으로의 대책 등을 담은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5월 12일 밤이 되자 수천 명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에워쌌고, 김기정의 집에도 몰려가 기물을 파손하였다. 경찰의 발포에 맞서 투석전을 벌인 군중들은 다음날에도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5월 19일까지 남자 39명과 여자 4명을 검거해 조사하고, 그중 21명을 5월 26일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최봉선은 이때 21명 중 한 사람으로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27년 12월 7일 마산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2월 19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였고,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1951년 YMCA 마산지회장을 역임하면서 마산여자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마산여자고등공민학교는 1954년 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로 개명하였고, 1969년에는 의신여자중학교로 전환되었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