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서울 동사헌(東四軒)[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초반 북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였으며, 이때부터 긴밀한 관계에 있던 이신애(李信愛)의 권유로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였다. 1919년 3월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의 주도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조선영원의 독립’, ‘세계영원의 평화’, ‘사회의 자유발전’을 기본 강령으로 내걸고,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가 망라된 독립운동 단체 결성을 도모하였다. 범민족적 단체 결성을 목표로 두었던 만큼, 사회 각층의 인물을 포섭하여 부문별 단(團)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중추 기관과 국민의사회(國民議事會) 등으로 구성된 부설 기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의친왕의 중국 망명과 본부의 중국 상하이[上海] 이전을 추진하였다.
또한 각종 선전물을 제작하고, 청년, 노인, 부인, 종교 분야의 인물들을 망라한 33인 대표를 구성하여 제2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박정선은 부인 대표로 선정되어 제2차 만세시위의 준비와 실행에 앞장섰다. 그는 나창헌(羅昌憲), 이신애, 정규식(鄭圭植) 등과 함께 1919년 11월 주1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종춘(李鍾春), 김익하(金益夏) 등 노인 대표들이 중국요리점 장춘관(長春館)에서 「제2회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위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때 3개 시위대가 각각 남대문 조선은행, 동대문 한일은행, 정동 배재학교(培材學校)에서 자동차를 앞세워 출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다소 지체되어 1919년 11월 28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오후 5시경 안국동 사거리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선 박정선은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벌어진 만세시위에 일제 경찰은 크게 당황하여 즉각적인 검거에 나섰다. 박정선은 이때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는 신문을 받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독립이 되기를 바란다.”, “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다 해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진술하였다.
이후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5월 21일 풀려날 당시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무수한 청춘남녀가 고생을 하는데, 죽을 곳을 얻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1927년 12월 3일 사망하였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