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부산은 피난지 수도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어렵게 뿌리 내렸던 한국 현대만화도 전쟁의 화마로 중단된 이후, 부산 피난지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때 임시방편으로 등장한 것이 딱지만화이다. 부산항에서 군수물자에 섞여 오던 일본만화를 청소년 작가들이 모작한 16페이지짜리 만화를 시중에서 유통했다. 노점에서 돌려 보거나 문방구에서 판매했다. 딱지만화는 작은 형태의 '딱지본 소설'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만화가 주로 창작, 거래되는 곳은 인쇄소가 몰려있고 시장이 활성화된 국제시장, 창선동과 동광동, 광복동 등에서 발행되었다.
이때 이와 같은 만화를 딱지, 뽑기, 떼기만화로 불렀다. 떼기, 뽑기만화는 문방구, 구멍가게에서 어린이들이 과자를 사면 경품으로 끼워주는 형태를 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당시 아마추어 만화가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딱지만화가 그려져 팔렸으며, 이를 유통하는 인쇄소가 난립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딱지만화 출판사는 산해당(山海堂)이다.
당시 산해당의 이영근 대표는 30대 중반으로 조악한 16페이지짜리 딱지만화를 다수 제작해 좌판 등에 유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손쉽게 그려 인쇄하는 이른바 노점과 문방구의 딱지만화의 범람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비난과 제재를 불렀다. 마구잡이 인쇄와 유통이 초래한 결과였다.
전쟁 속에서 한국 현대만화가 새롭게 생겨나면서 1951년 피난지 부산은 역사적인 곳이다. 삶의 터전이었던 국제시장과 동광동은 해외 물건이 유입되는 통로였다. 군수물자에 섞여 오던 일본만화를 베낀 노점 판매용 만화책이 인기를 끌었고 피난지에서 중요한 즐길 거리였다.
전국에서 모인 신인 청소년 작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딱지, 뽑기만화를 파는 좌판으로 시작한 만화시장에 도매상이 출현하였다. 전쟁 직후 딱지만화는 남녀노소 모두 즐길 거리일 뿐 아니라 척박한 현실을 대변하거나 고단한 현실 속에서 잠시라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였다.
피난지 부산은 출판과 유통의 실험지이자 요람이기도 했다. 일본만화 베끼기에서 신인 작가들, 학생만화가들의 출현으로 순수 창작만화가 생겨나면서 도, 소매가 활성해지고 유통도 늘어나면서 유통업도 전국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대부분 작가들과 도, 소매상들은 서울로 옮겨갔으며 결국, 1951년부터 2년간 피난지 부산에서 발전한 한국 현대만화는 부산을 시발점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