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대한협회가 발행한 『대한민보(大韓民報)』는 천도교 계열의 민족지였다.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은 자는 중일(仲一), 필명은 관재(貫齋), 또는 벽허자(碧虛子)로 21살에 작가로 데뷔했으며, 1905년에는 교육과 서적 편찬에 주 목적을 둔 애국계몽단체인 국민교육회에 들어가 편집 업무에 종사하였다. 1909년 오세창에 의해 발탁되어 『대한민보』에서 시사 만평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한민보』 창간과 함께 만화를 담당했는데, 처음부터 매일, 첫째면의 가운데에 ‘삽화’라는 이름으로 만화를 실었다. 그의 그림은 '삽화'라는 이름으로 실렸으며, 사진 제판 인쇄시설이 없어 이도영이 그린 그림을 이우승(李愚升)이 조각해 목판 인쇄했기 때문에 인쇄 상태는 별로 좋지 못했다.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친일파에 대한 준열한 비판과 민중계몽과 사회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대한민보』에 친일 협력 세력에 대한 비판, 일제 통감부 정책 비판, 대한자강운동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 칸짜리 시사만평이 게재되자, 통감부와 총독부가 사사건건 검열을 단행했고,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만평을 삭제하였다. 1909년 8월 12일 자 만평이 삭제된 이후, 1910년 5월 이후 네 번이나 만화가 삭제됐을 정도로 탄압이 극심했다. 구체적으로는 1909년 6월 26일 삭제, 1909년 8월 12일 삭제, 1909년 8월 21일 삭제, 1909년 10월 5일 삭제, 1910년 8월 18일 제353호 압수 및 발행 정지와 같은 수난을 겪었다.
이후에도 언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노골화되어 독자만화로 겨우 연명하던 일간지와 잡지의 시사만화는 1930년대 들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만화가 최초로 탄압받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