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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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은 조선 후기 병조참지,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중화, 호는 농암, 삼주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51년(효종 2)에 출생하여 1708년(숙종 34)에 사망했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칠정이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함은 기가 능히 이를 따름이요, 그 선하지 않음은 기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며 이이의 기발이승설을 지지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며, 시는 고상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농암집』 등이 있다. 양주의 석실서원에 제향되었다.
김창협 (金昌協)
김창협은 조선 후기 병조참지,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중화, 호는 농암, 삼주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51년(효종 2)에 출생하여 1708년(숙종 34)에 사망했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칠정이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함은 기가 능히 이를 따름이요, 그 선하지 않음은 기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며 이이의 기발이승설을 지지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며, 시는 고상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농암집』 등이 있다. 양주의 석실서원에 제향되었다.
해도입보책은 고려 정부가 몽고침입에 대응하여 지방 군현민을 해도로 입보시킨 정책이다. 해도입보전략이라고 한다. 몽골 침입 이전에는 외적이 침입해 오면 군현의 치소가 있는 성에 들어가서 대응하였다. 몽골 침입 당시에는 대몽항전을 위한 전략으로 해도를 입보처로 선택하였다. 강화천도가 결정되고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여 장기전을 도모하며 국가의 강압과 강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소극적인 방어책이나 수전(水戰)에 상대적으로 약한 몽고군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효과적 전술로 몽골과의 30년 장기전을 이끌었던 원동력으로 평가되었다.
해도입보책 (海島入保策)
해도입보책은 고려 정부가 몽고침입에 대응하여 지방 군현민을 해도로 입보시킨 정책이다. 해도입보전략이라고 한다. 몽골 침입 이전에는 외적이 침입해 오면 군현의 치소가 있는 성에 들어가서 대응하였다. 몽골 침입 당시에는 대몽항전을 위한 전략으로 해도를 입보처로 선택하였다. 강화천도가 결정되고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여 장기전을 도모하며 국가의 강압과 강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소극적인 방어책이나 수전(水戰)에 상대적으로 약한 몽고군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효과적 전술로 몽골과의 30년 장기전을 이끌었던 원동력으로 평가되었다.
출륙환도는 섬인 강화도에서 나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고려의 강화천도 이후 지속된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에 개경으로 환도한 사건이다. 고려는 출륙환도와 함께 인접한 섬에 백성들을 보내 놓고 방어하는 해도입보책을 실시하여 장기전을 유도하여 몽골군의 공격 의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몽골은 고려와의 전투나 교섭에서 최우선 사항으로 출륙환도를 요청하였다. 이처럼 출륙환도는 여·몽전쟁에 있어서 최대의 외교쟁점이었으며, 출륙환도 거부가 대몽항전의 핵심이었다.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출륙환도하여 몽골에 예속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의 항쟁이 이어졌다.
출륙환도 (出陸還都)
출륙환도는 섬인 강화도에서 나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고려의 강화천도 이후 지속된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에 개경으로 환도한 사건이다. 고려는 출륙환도와 함께 인접한 섬에 백성들을 보내 놓고 방어하는 해도입보책을 실시하여 장기전을 유도하여 몽골군의 공격 의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몽골은 고려와의 전투나 교섭에서 최우선 사항으로 출륙환도를 요청하였다. 이처럼 출륙환도는 여·몽전쟁에 있어서 최대의 외교쟁점이었으며, 출륙환도 거부가 대몽항전의 핵심이었다.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출륙환도하여 몽골에 예속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의 항쟁이 이어졌다.
1911년 서울에 창단되었던 신파극단.
혁신단 (革新團)
1911년 서울에 창단되었던 신파극단.
강화 석릉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1대 희종의 능이다. 강화 천도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다. 지하식 석실과 곡장 등 고려 왕릉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이면서도 8각 호석 등 일반적인 고려 능제와 구분되는 특징이 확인되었다.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강화 석릉 (江華 碩陵)
강화 석릉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1대 희종의 능이다. 강화 천도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다. 지하식 석실과 곡장 등 고려 왕릉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이면서도 8각 호석 등 일반적인 고려 능제와 구분되는 특징이 확인되었다.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 천도기(1232~1270)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로 지상식 석실과 8각 호석 등 일반적인 고려 능제와 구분되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강화 가릉 (江華 嘉陵)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 천도기(1232~1270)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로 지상식 석실과 8각 호석 등 일반적인 고려 능제와 구분되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경기좌도수군판관 등을 역임한 문신.
어한명 (魚漢明)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경기좌도수군판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장방형으로 축조된 돌방무덤. 석실분.
강화 능내리 석실분 (江華 陵內里 石室墳)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장방형으로 축조된 돌방무덤. 석실분.
구원일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하다가 강화부(江華府)의 우부천총(右部千摠)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갑곶진(甲串津)에서 순절하였다. 함께 전사한 본부의 중군(中軍) 황성신(黃善身), 좌부천총(左部千摠) 강흥업(姜興業)과 함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이들을 아울러 강도삼충(江都三忠)이라고 한다.
구원일 (具元一)
구원일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하다가 강화부(江華府)의 우부천총(右部千摠)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갑곶진(甲串津)에서 순절하였다. 함께 전사한 본부의 중군(中軍) 황성신(黃善身), 좌부천총(左部千摠) 강흥업(姜興業)과 함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이들을 아울러 강도삼충(江都三忠)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문신 김광환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사적을 수록하여 1641년에 간행한 역사서.
김의정강도정축록 (金議政江都丁丑錄)
조선후기 문신 김광환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사적을 수록하여 1641년에 간행한 역사서.
고려후기 최우의 심복으로 장군을 역임한 관리. 무신.
박승분 (朴承賁)
고려후기 최우의 심복으로 장군을 역임한 관리. 무신.
조선 후기의 문신, 강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72년에 간행한 시문집.
괴암문집 (槐菴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 강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72년에 간행한 시문집.
최항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시대 최우의 아들로서 최씨정권의 제3대 집권자이다. 서자로 출생한 이유 때문에 정치와 거리를 두도록 절로 보내어져 처음에는 송광사, 쌍계사 등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다. 1248년(고종 35)에 환속하여 후계자 수업을 받고 1249년(고종 36)에 최우의 정권을 계승하였다. 최우의 반몽 항전책을 계승하여 몽골의 침입에 적극 대응하였다. 전국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피란 입보를 추진하였고, 강도(강화도)의 방어시설 강화를 위하여 강도 중성을 축성하였다.
최항 (崔沆)
최항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시대 최우의 아들로서 최씨정권의 제3대 집권자이다. 서자로 출생한 이유 때문에 정치와 거리를 두도록 절로 보내어져 처음에는 송광사, 쌍계사 등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다. 1248년(고종 35)에 환속하여 후계자 수업을 받고 1249년(고종 36)에 최우의 정권을 계승하였다. 최우의 반몽 항전책을 계승하여 몽골의 침입에 적극 대응하였다. 전국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피란 입보를 추진하였고, 강도(강화도)의 방어시설 강화를 위하여 강도 중성을 축성하였다.
마도 3호선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이다. 이 선박은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거둔 각종 물자를 싣고 당시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를 향해 운항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이며, 전체적인 구조는 밑바닥과 이물, 고물이 모두 평평한 평저선이다. 선박 내부에서는 45점의 도기, 62종의 금속 유물, 빗, 장기알 등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목간을 통해 볼 때 마도 3호선의 침몰 연대는 1265~1268년 사이로 추정된다.
마도 3호선 (馬島 三號船)
마도 3호선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이다. 이 선박은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거둔 각종 물자를 싣고 당시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를 향해 운항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이며, 전체적인 구조는 밑바닥과 이물, 고물이 모두 평평한 평저선이다. 선박 내부에서는 45점의 도기, 62종의 금속 유물, 빗, 장기알 등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 출수되었다. 목간을 통해 볼 때 마도 3호선의 침몰 연대는 1265~1268년 사이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