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갑곶에서 순절한 무관.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그에 따라 강화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한 왕실 구성원들과 신료들의 가족들이 들어갔으며,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 등이 강화도의 방비를 총괄했다. 그러나 이들은 강화도를 안전한 요새로 여겨 방비를 엄히 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1월 21일 여러 장수들에게는 3일의 휴가가 주어졌는데 구원일은 집으로 가 있다가 청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이별한 뒤 갑곶진으로 돌아갔다. 이때 청군은 이미 근접하고 있었고 포탄을 비처럼 쏘아대며 상륙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경징, 장신 등은 적극적으로 대적할 뜻이 없었고 도주부터 하려고 하였다. 구원일은 분개하여 장신을 참하고 배에서 내려 육박전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장신이 이를 가로막으므로 통곡하며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당시 구원일과 함께 끝까지 적을 막고자 하였던 강화도의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과 좌부천총(左部千摠) 강흥업(姜興業)은 진해루(鎭海樓) 밑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순절하였는데, 이들을 두고 훗날 강도삼충(江都三忠)이라고 불렀다.
상훈과 추모
구원일은 충렬사에 가장 먼저 배향되었지만, 증직(贈職)은 가장 늦었는데, 이는 자손이 적었기 때문이다. 1664년(현종 5)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이를 아뢰었고, 구원일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1725년(영조 1)에는 삼충사(충렬사)에 사제(賜祭)하였다. 1763년(영조 39)에는 강화유수 정실(鄭實)이 올린 장계에 따라 구원일‧황선신의 자손을 변장(邊將)에 제수하는 조치가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 『인조실록』
-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 『강한집(江漢集)』
- 『소재집(疎齋集)』
- 『승정원일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춘관지(春官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 『황단배향제신목록(皇壇配享諸臣目錄)』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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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증손자의 아들. 또는 손자의 손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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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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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강화도에서 순절 : 『인조실록』 34권, 1637년(인조 15) 1월 22일.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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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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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주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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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변경을 지키는 장수. 흔히 첨사(僉使), 만호, 권관(權管)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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