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갑곶에서 순절한 무관.
이칭
여선(汝先)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82년(선조 15)
사망 연도
1637년(인조 15)
본관
능성(綾城)
주요 관직
강도(江都) 우부천총(右部千摠)
내용 요약

구원일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하다가 강화부(江華府)의 우부천총(右部千摠)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갑곶진(甲串津)에서 순절하였다. 함께 전사한 본부의 중군(中軍) 황성신(黃善身), 좌부천총(左部千摠) 강흥업(姜興業)과 함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이들을 아울러 강도삼충(江都三忠)이라고 한다.

정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갑곶에서 순절한 무관.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이다. 호조좌랑(戶曹佐郞) 구유관(具有寬)의 주1이다.

주요 활동

구원일의 초기 관력(官歷)은 확인되지 않는다. 강직하면서 스스로의 행실을 삼가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오래도록 쓰이지 못하다가 강화부의 우부천총으로 기용되었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군(淸軍)이 침입하자 국왕 인조 일행은 강화도로의 주2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강화도에는 주8을 비롯한 왕실 구성원들과 신료들의 가족들이 들어갔으며,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 등이 주3의 방비를 총괄했다. 그러나 이들은 강화도를 주4’으로 여겨 방비를 엄히 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1월 21일 여러 장수들에게는 3일의 휴가가 주어졌는데 구원일은 집으로 가 있다가 청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이별한 뒤 갑곶진으로 돌아갔다. 이때 청군은 이미 근접하고 있었고 포탄을 비처럼 쏘아대며 상륙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경징, 장신 등은 적극적으로 대적할 뜻이 없었고 도주부터 하려고 하였다. 구원일은 분개하여 장신을 참하고 배에서 내려 육박전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장신이 이를 가로막으므로 통곡하며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당시 구원일과 함께 끝까지 적을 막고자 하였던 강화도의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과 좌부천총(左部千摠) 강흥업(姜興業)은 진해루(鎭海樓) 밑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순절하였는데, 이들을 두고 훗날 강도삼충(江都三忠)이라고 불렀다.

상훈과 추모

1640년(인조 18) 강화도의 사민(士民)들이 사당을 세워 김상용(金尙容), 이상길(李尙吉), 심현(沈誢), 이시직(李時稷), 송시영(宋時榮)과 함께 구원일을 기렸다. 1643년(인조 21)에는 구원일의 의로운 죽음에 대한 포상 지시가 있었다. 1651년(효종 2)에는 중군 황선신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이후에 강흥업도 추향되었다. 1657년(효종 8) 충렬(忠烈)로 사액되었는데, 삼충사(三忠祠) 혹은 삼충단(三忠壇)이라고도 하였고, 강도사(江都祠)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구원일은 충렬사에 가장 먼저 배향되었지만, 주5은 가장 늦었는데, 이는 자손이 적었기 때문이다. 1664년(현종 5)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이를 아뢰었고, 구원일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1725년(영조 1)에는 삼충사(충렬사)에 주6하였다. 1763년(영조 39)에는 강화유수 정실(鄭實)이 올린 장계에 따라 구원일‧황선신의 자손을 주7에 제수하는 조치가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강한집(江漢集)』
『소재집(疎齋集)』
『승정원일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춘관지(春官志)』
『춘관통고(春官通考)』
『황단배향제신목록(皇壇配享諸臣目錄)』
주석
주1

증손자의 아들. 또는 손자의 손자.    우리말샘

주2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    우리말샘

주3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4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지.    우리말샘

주5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종이품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나 충신, 효자 및 학행(學行)이 높은 사람에게 내려 주었다.    우리말샘

주6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주던 일.

주7

변경을 지키는 장수. 흔히 첨사(僉使), 만호, 권관(權管)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8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