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은 만력(萬曆) 연간 무과에 급제하였다.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비변사의 낭청을 지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2월에 비변사 낭청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고, 같은 해 3월에는 외임으로 나갔다. 1629년(인조 7) 이산부사(理山府使)에 제수되었고, 1631(인조 9) 이완(李浣) · 배명순(裵命純) · 강진흔(姜晉昕) · 허동립(許東立)과 함께 비변사에 의해 불차탁용(不次擢用)되었다. 이로 보아 민영은 비교적 빠르게 승진하였으며 무관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31년 9월 4일 정사(政事)에서 이비(吏批)로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승서(陞敍)되었으나,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명망에 반해 무예는 출중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헌부(司憲府)의 제지를 받았다. 인조는 도체찰사(都體察使) 김류(金瑬)에게 하문하였고, 김류가 대론(臺論)에 동의함으로써 민영은 의주부윤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1633년(인조 11) 6월에는 혜산진(惠山鎭)의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정평부사(定平府使)를 지냈다. 1635년(인조 13) 10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고, 11월에 하직하여 12월에 부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군(淸軍)이 침입하자, 국왕 일행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항전하면서 제도(諸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였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 및 병마절도사들은 휘하의 영장(營將)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여 청군의 포위망을 풀고자 하였다.
먼저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의 군사가 험천(險川),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의 군대가 죽산(竹山)에 각각 도착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영장 권정길(權井吉)이 거느린 강원도 근왕병의 선발대가 검단산(儉丹山)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각기 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부분 패전하고 물러났다. 이 무렵 좌병사 허완(許完),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부터 30리가량 이격된 쌍령(雙嶺)에 도착하였다. 일시적으로 물러났다가 돌아와 죽산에 주둔하고 있던 충청병사 이의배도 군대를 거느리고 경상도 근왕군에 합류했는데 총 4만여 명으로 일컬어질 만큼 군세가 컸다.
1637년(인조 15) 1월 3일 요토가 거느리는 청군이 쌍령을 공격하였다. 격전 끝에 경상도 근왕군은 대패하였는데, 허완과 민영‧이의배‧ 최진립(崔震立)‧ 선세강(宣世綱) 등 주요 지휘관이 모두 전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전투 도중 군중에서 실화(失火)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도 하며, 패전의 경위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있지만 당시에도 구체적인 패전의 경위는 파악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이의배와 허완은 전장에서 탈출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나국(拿鞫)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증직과 정려(旌閭)가 이루어졌다. 쌍령 전투는 당시 실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이후 전사자들에 대한 다양한 현창이 이루어지면서 사실 관계도 적지 않게 왜곡되었다. 이 때문에 쌍령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졸전 끝에 참패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조선의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구원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좌절시킨 점을 주목해야 한다.
쌍령 전투 이후에도 조선 근왕병은 상당한 규모로 남아 있었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력이 점차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원(迷原; 지금의 경기도 양평 지역)에 집결한 조선 근왕군은 남한산성에 접근하려 하기보다는 외곽에 주둔하면서 청군을 견제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쌍령 전투 이후 조선군은 청군과 정면으로 대적하기보다는 대치 국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대치 국면은 청의 호쇼 친왕(親王) 도르곤의 강도(江都) 함락으로 좌절되었고, 인조는 출성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민영은 처음부터 전사한 사실이 알려졌으며 곧바로 증직 명령이 내려졌다. 민영은 처음부터 신뢰할 장수로 여겨지고 있었고, 남한산성에서도 근왕할 만한 병마절도사로 거론되었다. 실제로 우병사 민영이 근왕병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사실이 수차례 남한산성에 전해졌으며, 1637년(인조 15) 1월 15일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의 장계로 그의 전사 사실이 알려졌다.
청군이 철수한 직후인 같은 해 2월 26일, 비변사에서 사절인(死節人)으로 인정되어 증직의 대상이 되었고 인조는 제물(祭物)을 지급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는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민영은 상주영장(尙州營將) 윤여임(尹汝任),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과 함께 가장 먼저 거론된 사절인 3인에 포함되었다. 이때 민영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1638년(인조 16) 3월에는 전사 사실이 새로 밝혀진 허완에게도 민영의 사례를 따르라는 지시가 내려져 병조판서 증직이 이루어졌다.
민영은 이후에도 사절인으로 계속해서 기억되었다. 병자호란 직후부터 대규모의 전사자가 발생한 쌍령은 험천‧강도와 함께 지속적으로 국왕의 사제(賜祭)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1688년(숙종 14) 2월, 쌍령을 지나던 숙종은 민영과 허완의 사절을 회상하면서 자손 녹용을 명하였다. 1701년(숙종 27) 6월에는 숙종이 정려(旌閭)를 지시하였고, 1708년(숙종 34) 8월에는 쌍령에 민영과 허완 등의 사절인의 사적을 새긴 묘갈(墓碣)을 제작하여 제단 옆에 세우게 하였다.
1730년(영조 6) 2월, 영조는 민영 등의 자손들을 따로 녹용하라고 지시하였고, 1755년(영조 31) 12월에는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뽑은 26인의 척화인(斥和人)과 절사인(節死人)에 속하여 치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1761년(영조 37) 4월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