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노성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청요직을 두루 역임한 문신.
이칭
명서(明瑞)
운곡(雲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3년(선조 36)
사망 연도
1667년(현종 8)
본관
의령(宜寧)
주요 관직
도승지
내용 요약

남노성은 조선 후기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문신이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남언경의 증손이다. 동부승지부터 도승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승지직을 맡았으며 대사간(大司諫)에 누차 제수되었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의 참의 및 호조, 병조, 공조 등의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사신으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외직으로는 안동부사, 함경도관찰사, 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키워드
정의
조선 후기 청요직을 두루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명서(明瑞), 호는 운곡(雲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언경(南彦經), 할아버지는 남격(南格)이다. 아버지는 생원 남호학(南好學),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부인은 두 명인데, 한의(韓嶷)의 딸과 이안인(李安訒)의 딸이다.

주요 활동

남노성은 1624년(인조 2) 주1에서 생원시(生員試) 3등으로 입격하여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7월, 성균관의 칠석상순윤차단자(七夕上旬輪次單子)로 인하여 주2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1631년(인조 9) 1월, 인조가 성균관의 학생들에게 주3하였을 때 3등을 차지하였으나 수석한 이창립(李昌立)이 실격하여 주4 생원(居首生員)으로서 주5의 기회를 받았다. 같은 해 별시 문과(別試文科)에서 주6 10위로 급제하였다. 1631년(인조 9) 11월 주7)가 되었고, 동년 12월에는 승문원(承文院)의 신래(新來)로 간택되었다. 같은 달 예조(禮曹)에서 뽑아서 아뢴 30세 이하의 주8 문신(專經文臣)에 들었다.

1634년(인조 12)부터 1636년(인조 14)까지 예문관 검열(檢閱), 승정원 주서(注書), 주9 겸설서(兼說書), 예문관 봉교(奉敎), 사간원 정언(正言), 병조좌랑(兵曹佐郎)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호종록(扈從錄)에 기록되었다. 이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주로 윤방(尹昉)이나 김류(金瑬) 등 병자호란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청하였다. 1639년(인조 17), 1640년(인조 18)에는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서는 육조의 낭청과 삼사의 관원을 지냈다.

1641년(인조 19) 3월에는 특명으로 문학(文學)에 제수되었으나, 남이웅(南以雄)과의 갈등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4월 청나라의 심양(瀋陽)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어 고향인 원주(原州)에 갔다가 외할아버지 김상용(金尙容)의 묘를 찾아가려고 하였는데, 어머니 김씨가 아들이 정축년 이후에 출사한 점과 심양에 가게 된 점을 들어 이를 막아섰다. 같은 해 5월에 심양으로 파견되어 10월에 귀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11월에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고, 이후에 주로 삼사의 관원을 지냈다. 1645년(인조 23) 주10의 세자 책봉을 위한 책례도감(冊禮都監)도청(都廳)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 3월, 강빈(姜嬪)을 구하기 위해 대간직을 사직하였다가 파직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재기용되었다.

1647년(인조 25) 11월 궁궐 영건을 담당한 수리소(修理所)의 도청으로 임무를 수행하여 주11으로 승진하고, 12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듬해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650년(효종 즉위) 11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승지직을 지냈으며 호조참의,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거쳤다. 1654년(효종 5)에는 좌승지(左承旨)와 우승지(右承旨)를 번갈아 지내고 그해 8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7월 파견되었다.

1655년(효종 6) 12월 별전(別殿)의 축조 문제로 인해 주12되었다가 파직되고, 1년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1656년(효종 7) 8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주13되었다가 병조참의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7년(효종 8) 3월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듬해 6월 삼수(三水)에 귀양 가 있던 의관 정지문(鄭之問)이 유배지를 이탈하여 병영을 거쳐 감영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대죄하였고 파직되었다. 1658년(효종 9) 12월에는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로서 청의 칙사를 접대하였고,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 2월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어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1660년(현종 1) 1월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의 위판(位版) 절도 및 파손 사건에서 비롯된 옥사로 인해 파직되었다. 1661년(현종 2) 8월에 재기용되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63년(현종 4) 6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 그해 10월 예조참판으로 재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667년(현종 8)까지 병조참판, 호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학문과 교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게 수학하였고, 계곡(谿谷) 장유(張維),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등과 교유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방목(國朝榜目)』
『동강유집(東江遺集)』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응천일록(凝川日錄)』
『인조실록(仁祖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 태종 1년(1401)에 처음 실시하였으며 생진과의 초시와 복시, 문과의 초시ㆍ복시ㆍ전시 5단계로 나누었다.    우리말샘

주2

정규 과거 이외의 특별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었을 때에 초시를 면제하고 회시를 치르게 하는 특전.

주3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    우리말샘

주4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함.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5

합격자의 순서를 가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 직접 응시할 자격을 주던 일. 식년과 문과의 예비 시험인 초시와 본시험인 복시를 면제하였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 문과(文科)에서는 23명, 무과(武科)에서는 20명을 뽑아 정구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우리말샘

주7

조선 시대에, 승정원에 속한 정칠품 벼슬. 주서(注書)가 사고를 당할 때에 그 일을 대신 맡아보게 하기 위하여 정원(定員) 이외로 두었다.    우리말샘

주8

경학을 전공함.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ㆍ왕태자시강원ㆍ황태자시강원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0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    우리말샘

주11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상(上)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

주12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3

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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