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한 문신.
이칭
천휴(天休)
만휴당(晩休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9년(선조 32)
사망 연도
1680년(숙종 6)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군자감(軍資監) 정(正)|예빈시(禮賓寺)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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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수창은 조선 후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한 문신이다. 문충공 김상헌의 손자로서 음직으로 벼슬에 나갔다. 병자호란 때 호종하였고 비안현감, 합천군수, 익산군수, 안악군수, 파주목사 등의 외직을 역임했다. 군자감 정(正), 예빈시 정 등을 역임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휴(天休),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다. 할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이다. 아버지는 승지(承旨) 관직을 받은 김광형(金光炯),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헌심(李獻諶)의 딸이다.

주요 활동

김수창은 어린 시절부터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24년(인조 2) 음직으로 봉선전(奉先殿) 참봉(參奉)이 되었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翊衛)를 거쳐 1629년(인조 7) 3월 상서원(尙瑞院) 부직장(副直長)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9월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가 되었고,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호종록(扈從錄)에 들었다. 1639년(인조 17) 6월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외직에 나갔으며, 1645년(인조 23) 6월에 돌아와서는 상의원(尙衣院)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비변사 낭청을 거쳐 이듬해 2월 합천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3월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을 지내고, 1652년(효종 3) 2월에는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나갔는데 2년 뒤 낙마하여 파출되었다가 얼마 뒤 직첩을 돌려받았다. 1655년(효종 6) 11월 한성서윤(漢城庶尹)에 제수되었다가 12월 임천군수(林川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익산군수로 지낼 때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체차되었다. 1656년(효종 7) 5월, 선공감(繕工監) 첨정(僉正)을 거쳐 1657년(효종 8) 8월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1월에는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냈고, 1663년(현종 4) 10월 사도시(司䆃寺) 정(正)에 임명되었다. 1670년(현종 11) 장악원 첨정, 1673년(현종 14) 7월 군자감(軍資監) 정, 1675년(숙종 1) 7월, 예빈시(禮賓寺) 정 등을 역임하였다. 1677년(숙종 3) 4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고 같은 해 6월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사망 후 승지로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절곡집(節谷集)』
『효종실록(孝宗實錄)』

인터넷 자료

장서각 기록유산 DB(https://visualjoseon.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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