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국회프락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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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조선일보사 목포지국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병회 (金秉會)
조선일보사 목포지국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간부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옥주 (金沃周)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간부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일제강점기 때, 항일투쟁 학생모임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정진근 (鄭鎭瑾)
일제강점기 때, 항일투쟁 학생모임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대검찰청 검사, 한국반공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국회프락치사건과 진보당사건 등을 담당하며 보수우익의 대표 인사로 불린 법조인·정치인.
오제도 (吳制道)
대검찰청 검사, 한국반공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국회프락치사건과 진보당사건 등을 담당하며 보수우익의 대표 인사로 불린 법조인·정치인.
김익노는 국회의원, 국회징계자격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활동에 일조한 정치인이다. 1905년 경북 칠곡 출생으로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수학한 후 경북 달성군청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50년, 1954년, 1958년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9월 이승만의 3선 개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부정행위로 인해 기소된 후, 이듬해 대법원에서 선거무효 판결을 받았다.
김익노 (金益魯)
김익노는 국회의원, 국회징계자격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활동에 일조한 정치인이다. 1905년 경북 칠곡 출생으로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수학한 후 경북 달성군청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50년, 1954년, 1958년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9월 이승만의 3선 개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부정행위로 인해 기소된 후, 이듬해 대법원에서 선거무효 판결을 받았다.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배헌 (裵憲)
배헌은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고국에 입국해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이리야구협회 창립과 함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대한국민당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동청년당 묵호읍단부 단장 ·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12년 12월 2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강릉 갑구 대동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6월 국회 상임위원회 운수체신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55년 자유당 조사부 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9월부터 사단법인 대한군경원호회 전임 부회장을 맡아 1960년 4·19혁명 때까지 재임했다. 1997년 대한민국 헌정회 편집위원회 의장, 대한민국 건국회 상임고문 및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2년 2월 9일 사망했다.
원장길 (元長吉)
대동청년당 묵호읍단부 단장 ·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12년 12월 2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강릉 갑구 대동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6월 국회 상임위원회 운수체신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55년 자유당 조사부 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9월부터 사단법인 대한군경원호회 전임 부회장을 맡아 1960년 4·19혁명 때까지 재임했다. 1997년 대한민국 헌정회 편집위원회 의장, 대한민국 건국회 상임고문 및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2년 2월 9일 사망했다.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구수 (李龜洙)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을 역임한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