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군정청"
검색결과 총 10건
미소군정기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를 패전국과 같은 분할점령지역으로 설정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국내에서는 하나의 독립국가 건설을 놓고 여러 견해가 치열하게 충돌했고, 미국과 소련도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미소군정기 (美蘇軍政期)
미소군정기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를 패전국과 같은 분할점령지역으로 설정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국내에서는 하나의 독립국가 건설을 놓고 여러 견해가 치열하게 충돌했고, 미국과 소련도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이기붕은 해방 이후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1934년 귀국해 광산 산업을 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피신해 있다가 4월 28일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이기붕 (李起鵬)
이기붕은 해방 이후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1934년 귀국해 광산 산업을 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피신해 있다가 4월 28일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송진우 (宋鎭禹)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군정장관은 해방 직후부터 정부수립까지 북위 38도선 이남에 존재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 최고책임자의 관직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여 남과 북을 각각 점령하였다. 북위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3년간 남한을 점령하고 미군정청을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역대 군정장관은 아놀드 소장(초대), 러취 소장(2대), 딘 소장(3대)이었다. 이 중 러취는 친우익적 성향의 인사로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가까웠다. 미군정은 한국인을 통한 간접통치를 실시하였으나 실권은 미군정 고위관료들이 장악하였다.
군정장관 (軍政長官)
군정장관은 해방 직후부터 정부수립까지 북위 38도선 이남에 존재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 최고책임자의 관직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여 남과 북을 각각 점령하였다. 북위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3년간 남한을 점령하고 미군정청을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역대 군정장관은 아놀드 소장(초대), 러취 소장(2대), 딘 소장(3대)이었다. 이 중 러취는 친우익적 성향의 인사로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가까웠다. 미군정은 한국인을 통한 간접통치를 실시하였으나 실권은 미군정 고위관료들이 장악하였다.
1945년 10월 2일부터 1952년 4월 28일까지 일본에 있었던 연합국 사령부.
연합국 최고사령부 (聯合國 最高司令部)
1945년 10월 2일부터 1952년 4월 28일까지 일본에 있었던 연합국 사령부.
1945년 조선어학회에서 초등학교의 국어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초등국어교본 (初等國語敎本)
1945년 조선어학회에서 초등학교의 국어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1946년 진단학회에서 중등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국사교과서.
국사교본 (國史敎本)
1946년 진단학회에서 중등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 국사교과서.
조선교육심의회는 미군정기에 한국인이 참여하는 미군정청 학무국의 교육자문기구로서, 장기적인 교육 계획 수립을 수립하였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활동하였는데,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6-3-3-4를 골격으로 하는 단선형 기본 학제, 초등학교 의무교육제 등 해방 후 한국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교육심의회 (朝鮮敎育審議會)
조선교육심의회는 미군정기에 한국인이 참여하는 미군정청 학무국의 교육자문기구로서, 장기적인 교육 계획 수립을 수립하였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활동하였는데,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6-3-3-4를 골격으로 하는 단선형 기본 학제, 초등학교 의무교육제 등 해방 후 한국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전규홍은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과 미국에서 법학 등을 전공하였고, 미주 흥사단 시카고지부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입법의원 사무총장,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총무처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5·16 직후 정치정화법에 따라 강제로 사회 활동을 정지당하였다.
전규홍 (全奎弘)
전규홍은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과 미국에서 법학 등을 전공하였고, 미주 흥사단 시카고지부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 사법부 행정차관, 입법의원 사무총장, 제헌국회 초대 사무총장, 총무처장, 주프랑스 공사, 서독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5·16 직후 정치정화법에 따라 강제로 사회 활동을 정지당하였다.
농민주보는 1945년 12월 17일 미군정청 공보부에서 창간하여 농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배부한 한글 신문이다. 타블로이드판 4면 주간지로서 창간 당시 80만부를 발간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이후 여러 사정으로 격주 또는 월간으로 발간되기도 했으며, 부수도 1947년 들어서 30만부로 축소되었고 1948년 2월부터는 평균 7만 5천부 정도가 발행되었다. 지면 구성은 미군정의 주요 활동, 한국 및 한국 관련 국제뉴스, 정치교육, 영농교육, 가정란 등으로 이루어졌다.
농민주보 (農民週報)
농민주보는 1945년 12월 17일 미군정청 공보부에서 창간하여 농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배부한 한글 신문이다. 타블로이드판 4면 주간지로서 창간 당시 80만부를 발간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이후 여러 사정으로 격주 또는 월간으로 발간되기도 했으며, 부수도 1947년 들어서 30만부로 축소되었고 1948년 2월부터는 평균 7만 5천부 정도가 발행되었다. 지면 구성은 미군정의 주요 활동, 한국 및 한국 관련 국제뉴스, 정치교육, 영농교육, 가정란 등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