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을 점령하여 군정을 시작한 미국으로서는 한국인에 대한 주1 활동이 필요하였다. 특히 미군정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좌파 세력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기에 미군정청으로서는 공보 활동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다. 미군정으로서는 수많은 농민들에게 중요한 성명, 법령, 규정, 새롭고 유용한 영농법 등을 알려줄 수단이 반드시 필요했다. 애초 공보 활동은 주한 미군사령부가 담당하였으나, 1946년 1월 14일 정식으로 주한미군정청이 설립되면서 그 산하의 공보국[부]이 관장하였다. 1947년 5월에는 미군사령부에 공보원이 설립되어 더욱 공보활동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공보 담당 부서에서는 신문, 라디오, 영화, 포스터, 전단 등 다양한 매체를 사안에 따라 활용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도시민을 대상으로 발행한 『주간신보』[주간 Digest], 농민을 대상으로 한 『농민주보』[Farmer's Weekly]와 『주간 세계신보』[The World News] 등이 있었다.
미군 공보기구가 가장 오래 발행한 대표적인 인쇄매체였다. 발간을 책임진 것은 군정청 공보부였으며 주2 판 4면 신문이었다. 1945년 12월 17일 창간 당시에는 80만부를 발행하였으나, 1946년 60만부, 1946년 10월 55만부, 1947년 5월 30만부로 점차 감축 발행하였고, 1948년 2월부터는 평균 7만 5천부 정도가 발행되었다. 발행 주기 역시 애초 주간지로 출발했으나 격주로 발행되기도 했고, 1947년 들어서는 월간으로 발행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편집자는 1945년 12월 창간호부터 1947년 6월까지 시어도어(Augustus J. Theodore) 미 육군 대위였으며 후임은 에이다 리케(Miss Ada Leeke)였다. 창간 당시에는 소설가 방인근이 한국인으로서 주3을 맡았다. 방인근은 1930년대 대중 소설가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1940년대 매일신보와 방송국을 통해 주4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농민주보』 편집은 군정청 공보부장은 물론이고 군정장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이 직접 공보 주제 등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인 주간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농민주보』는 미군정이 발표한 성명서와 보도자료에 기반했고 한국인들의 역할은 주로 이를 번역하는 것이었다.
『농민주보』의 배포 체계는 주로 미군정 조직을 이용한 것이었으나 교통, 장비 등의 부족으로 원활하게 진행되기 힘들었다. 인쇄된 『농민주보』는 9개 도의 군정장관에게 전달되어 군정중대를 거쳐 군수, 그리고 각 면에 배포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교통체계 미비로 면 단위까지 전달이 쉽지 않았으며 또한 한국인 관리들의 관심 부족으로 그 이하 단위로의 배포도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회당 70여 건을 넘나드는 기사를 게재했는데, 총 4면의 지면 구성을 보면 제1면은 뉴스면으로 미군정의 주요 활동, 한국과 한국 관련 국제뉴스를 게재했고, 제2면은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교육과 미군정의 정치적 방침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제3면은 영농 및 농업 교육 등 농사 관련 기사, 제4면은 가정란이었다. 가정란은 문화 관련도 포함되어 한글 맞춤법, 국사 강좌, 부인란, 어린이 차지 등이 배치되었다. 1면과 2면이 정치, 3면이 경제, 4면은 가정 및 문화를 담당하는 지면 구성이었다.
모든 지면은 미군정의 방침을 충실히 홍보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경제면 역시 영농 기법과 함께 미곡 수집령과 같은 미군정의 농업 방침을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가정란의 경우 미국의 가치관과 관습,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계몽적 목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물량과 다종다양한 기사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지만, 기본적으로 농민들의 입장보다는 미군정의 필요와 목적을 우선시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