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부터 주한미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에 의해 제작 · 상영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국과 소련 간의 주1은 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양 진영의 주2 대결도 더 한층 격화된다. 당시 소련은 미국을 증오하는 각종 선전 캠페인을 강화하고 있었고 좌파 세력이 강했던 유럽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주3라고 비판하는 경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국은 선전과 홍보 등 심리전을 통해 소련과 주4에 대항해 주5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설득해야 할 필요성이 커져갔다.
이에 미국은 공보 및 심리전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1952년 미 국무부의 공보 관련 예산은 1948년에 비해 5배가 넘는 1억 1천 5백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심리전 정책도 강화되어 1951년 4월에는 각 기관의 심리전 계획을 조정할 심리작전위원회[Psychological Strategy Board]가 설치되었다. 이미 미국의 주요 영화사들은 주6을 통해 수많은 뉴스 영화를 만들어온 경험이 있었고 미 정부는 영상물의 효과를 충분히 파악한 상황이었다. 이에 1951년 미 국무부는 킹피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뉴스 영화를 통한 대공 심리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자유, 국제연합, 미국의 힘, 평화, 미국의 과학과 교육의 우월함 등을 집중 강조하고자 하였다.
미 국무부가 제작해서 보낸 이러한 영상물 상영을 담당하던 주한미공보원은 한국인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뉴스 영화 제작이 필요함을 건의하여 관철시키고 리버티 프로덕션을 설립, 자체 제작에 착수하게 된다.
1952년 5월 19일 제1호를 시작으로 격주로 발행되었으며 분량은 11분 가량이었는데, 국내 뉴스와 국제 뉴스가 각각 5분 가량 포함되었다. 뉴스 외에 한미 양국 간의 문화교류, 민주주의 사상과 시민생활을 계몽하고 서구의 생활, 풍습, 전통을 소개하는 데 많은 비중을 두었다. 1967년까지 총 721호가 발행되었으나 현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624편이 보관되어 있다.
1960년대 들어 TV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뉴스 영화는 경쟁우위를 상실해가고 있었고 CIA가 자유 유럽라디오에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미국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불러올 역효과에 대한 우려가 커져갔다. 이에 미국 해외공보처[USIA,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는 뉴스 영화 제작 중단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1967년을 끝으로 제작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1950년대 대한민국 정부가 제작하여 상영하던 대한뉴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선전 색채가 적은 반면 국내 언론이 담기 힘든 국내 뉴스의 이면을 보여주기도 해 학생과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한 신뢰를 쌓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국에 의해 설립되었기에 애초부터 주7를 기저에 깔고 문화냉전의 도구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 주8을 위한 보도에 소홀했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해외 뉴스는 미국 관련 뉴스가 80%에 육박할 정도로 주제와 소재의 선정부터 보도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목적에 충실했기에 한국의 이해와 요구가 반영되기 곤란했다.
뉴스 영화라는 특성상 촬영과 편집 등 영화기술이 중요했는데, 당시 한국 영화계 현실에 비추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상물을 생산하였다. 주한미공보원이 제작했지만 실제 영상을 만든 것은 영화감독 김기영 등 한국의 영화예술인들이었기에 한국인의 입장이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기도 했다. 진해 근처 상남에 자리잡은 리버티 프로덕션은 당시 최첨단의 영화기자재를 갖추어 ‘한국의 영화학교’로 불릴 정도였으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 영화계에 숨통을 틔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