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22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갔으며, 14년간의 유학 생활 끝에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 야학부를 마쳤다. 1928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세인트 존스 대학교[석사] 등에서 역사학 등을 전공하였고, 다시 로욜라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3년 로욜라 대학교 재학 중 미주 흥사단 시카고지부에 입단하여 흥사단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8년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같은 해 6월 귀국하였다.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청 특별검사청에서 '공무원 번호 1번'으로 근무를 시작하였으며, 1946년 6월 사법부 행정차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남조선 입법의원 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5월, 대법관 이상기 등과 함께 미국 사법계 시찰을 위해 3개월 일정으로 출국하였다. 1948년 5·10총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8년 6월 제헌국회 제13차 본회의에서 '전규홍 사무총장 인준에 관한 건'이 상정되어 150 대 2로 가결됨으로써 정식으로 초대 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9월에는 장면, 장기영, 김활란 등과 함께 제3차 국제연합 총회 파견 대표로서 미국을 방문하였다. 11월 21일, 서울운동장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유엔 한국대표 격려 국민대회'에 참석, 유엔총회에 대해 보고하기도 하였다. 그 직후인 29일부로 총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월 유엔신한국위원단의 방한을 앞두고 구성된 환영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주프랑스 공사로 발령받아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1954년 6월에 귀국하였고, 이듬해부터 동국대학교 부총장을 맡았다. 그 후 1960년 11월 장면 정부에 의해 서독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받았다.
5·16 직후 정치정화법에 따라 강제로 사회 활동을 정지당하자, 1963년에 한국의 군부통치를 비판하는 백악관 앞 시위에 나서기도 하였다. 미주에서 흥사단 활동에 참여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2001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