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천도교 신자이다.
경성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졸업하였으며, 1919년 홍원군 천도교 신자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천도교 청년회 주관 전국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고학생구제회 발기인, 조선교육협회 이사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듬해 10월 조선인출가노동자조사회 창립총회에 참석, 위원[10명]에 선출되었다. 11월에는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충청남북도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에 참석, 중앙집행위원[총 30인]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시기, 전조선청년당대회 준비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었다. 1924년에는 휘문고 맹휴 사건 제명 학생을 위한 실행위원회 위원, 기근대책강구회의 상무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정우회 검사위원, 1929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총 50명], 집행위원 등에 선정되었다.
해방 직후 한국광복군 선전부장 직함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12월 애국금헌성회[위원장 오세창] 중앙위원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2월 비상국민회의 선전정보위원회[위원장 엄항섭]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1월 한민당 중앙위원 명단에 올랐으나 곧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위원장 김구] 중앙집행위원[총 30명]으로 선출되었다. 8월에는 한국민족대표자대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이듬해 3월 민족대표단 결성대회에서 대표위원[총 30명]으로 선발되었다.
같은 시기, 독립촉성국민회 후생부장, 감찰위원 등에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주당이 주도하는 이북대표단에도 관여하였다. 7월에는 대한민국정부수립국민축하준비위원회[총재 이승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10월 체신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54년에는 감찰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서울에서 사망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