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목사"
검색결과 총 27건
목사는 개신교 교회에서 교인을 지도하고 교회를 이끌어 가며 종교적 임무를 책임지는 전문직이다.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교단 산하의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소정의 목회 경험을 이수한 후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 목사의 칭호는 위임목사 등 다양하며,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도 있다.
목사 (牧師)
목사는 개신교 교회에서 교인을 지도하고 교회를 이끌어 가며 종교적 임무를 책임지는 전문직이다.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교단 산하의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소정의 목회 경험을 이수한 후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 목사의 칭호는 위임목사 등 다양하며,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도 있다.
「양이목사본풀이」는 제주 양씨 명월파 집안에서 믿어 온 집안 수호신 양이 목사에 대한 서사 무가이다. 조정에 진상할 말을 가로챈 죄로 죽은 양이 목사가 어떤 연유로 양씨 집안의 조상으로 모셔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조상 본풀이이다. 단 한 편의 채록본이 있을 뿐이지만, 제주도 본풀이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양이목사본풀이 (梁이牧使本풀이)
「양이목사본풀이」는 제주 양씨 명월파 집안에서 믿어 온 집안 수호신 양이 목사에 대한 서사 무가이다. 조정에 진상할 말을 가로챈 죄로 죽은 양이 목사가 어떤 연유로 양씨 집안의 조상으로 모셔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조상 본풀이이다. 단 한 편의 채록본이 있을 뿐이지만, 제주도 본풀이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강신명은 해방 이후에 숭실대학교 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목사이자 교육자이다. 선천남교회, 선천북교회, 영락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으며, 새문안교회에서 24년 동안 재직하고 원로 목사로 추대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목사로서 교계 연합 활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반인권적 독재 정치에 반대하여 활동하였다. 교육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미국 스털링대학교의 명예 신학 박사 학위와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강신명 (姜信明)
강신명은 해방 이후에 숭실대학교 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목사이자 교육자이다. 선천남교회, 선천북교회, 영락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으며, 새문안교회에서 24년 동안 재직하고 원로 목사로 추대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목사로서 교계 연합 활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반인권적 독재 정치에 반대하여 활동하였다. 교육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미국 스털링대학교의 명예 신학 박사 학위와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고려·조선 시대 지방 행정구획의 명칭.
목 (牧)
고려·조선 시대 지방 행정구획의 명칭.
남유는 조선 후기 서천군수와 부평부사를 역임한 무신이다. 이후 평해군수, 도총부 경력, 용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하던 중 기복(起復)하여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하(幕下)로 활동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남유 (南瑜)
남유는 조선 후기 서천군수와 부평부사를 역임한 무신이다. 이후 평해군수, 도총부 경력, 용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하던 중 기복(起復)하여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하(幕下)로 활동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김응태는 일제강점기, 감리교 목사이다. 동대문교회와 인천 내리교회 등에서 목회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기남교구장(1941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전도국장(1943년)에 이어서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로 임명되어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감리교 호헌파 총회 감독을 지냈다.
김응태 (金應泰)
김응태는 일제강점기, 감리교 목사이다. 동대문교회와 인천 내리교회 등에서 목회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기남교구장(1941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전도국장(1943년)에 이어서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로 임명되어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감리교 호헌파 총회 감독을 지냈다.
김익두는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부흥사로서 큰 업적을 남긴 평양신학교 출신의 개신교 목사이다.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재령과 신천 등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역을 감당했으며, 신유를 행하는 부흥사로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위안과 소망을 주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확장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해방 후 북한 지역 교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했다. 신천교회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김익두 (金益斗)
김익두는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부흥사로서 큰 업적을 남긴 평양신학교 출신의 개신교 목사이다.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재령과 신천 등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역을 감당했으며, 신유를 행하는 부흥사로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위안과 소망을 주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확장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해방 후 북한 지역 교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했다. 신천교회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문익환은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친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이다. 1918년 6월 1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지신진 명동촌 동거우에서 태어나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진보 계열의 개신교 목사로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또한 성서 학자로서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와 함께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개신교 측 번역자로 참여하는 등 신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익환 (文益煥)
문익환은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친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이다. 1918년 6월 1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지신진 명동촌 동거우에서 태어나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진보 계열의 개신교 목사로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또한 성서 학자로서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와 함께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개신교 측 번역자로 참여하는 등 신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창식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인이다. 선교사들의 신실한 생활에 감동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1892년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되었다. 그 후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큰 고난을 겪었다. 1896년부터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아 서북 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한국인 최초 목사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
김창식 (金昌植)
김창식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인이다. 선교사들의 신실한 생활에 감동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1892년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되었다. 그 후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큰 고난을 겪었다. 1896년부터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아 서북 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한국인 최초 목사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
나주읍성은 고려 후기 토성으로 세워져 조선 시대까지 총 4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진 성곽이다. 나주읍성은 객사가 있는 성북동 일대를 중심으로 확장되고 이후 동측과 북측으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현재 동·서·북 문지 일대와 금성관 일대 조사 결과,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나주읍성은 고려 후기에 토성으로 만들어져 조선 시대 때 석축성으로 변화하면서 크게 증축되었다.
나주읍성 (羅州邑城)
나주읍성은 고려 후기 토성으로 세워져 조선 시대까지 총 4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진 성곽이다. 나주읍성은 객사가 있는 성북동 일대를 중심으로 확장되고 이후 동측과 북측으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현재 동·서·북 문지 일대와 금성관 일대 조사 결과,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나주읍성은 고려 후기에 토성으로 만들어져 조선 시대 때 석축성으로 변화하면서 크게 증축되었다.
조선 전기에, 남원부사, 제주목사, 인령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오식 (吳湜)
조선 전기에, 남원부사, 제주목사, 인령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수령은 고려시대 이후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린 지방관이다. 고려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전국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수령의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 다양하지만 모두 관찰사의 관할하에 있었다. 조선은 원활한 수령제 운영을 위하여 수령의 선발, 임기, 고과의 기준을 정비하였다. 수령은 군현에서 수령칠사를 담당하였고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는 향리와 면리임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가 존재하였다.
수령 (守令)
수령은 고려시대 이후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린 지방관이다. 고려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전국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수령의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 다양하지만 모두 관찰사의 관할하에 있었다. 조선은 원활한 수령제 운영을 위하여 수령의 선발, 임기, 고과의 기준을 정비하였다. 수령은 군현에서 수령칠사를 담당하였고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는 향리와 면리임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가 존재하였다.
전밀라는 1955년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목사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권서의 딸로 출생하여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4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명화용과 함께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인천 창영교회와 서울 양광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총무로 활약하였다.
전밀라 (全密羅)
전밀라는 1955년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목사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권서의 딸로 출생하여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4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명화용과 함께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인천 창영교회와 서울 양광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총무로 활약하였다.
최병헌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 겸 신학자, 언론인, 정미의병 선유사로 활동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정동교회를 담임하여 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목회 활동뿐만 아니라 근대적 선각자로 한말 언론인,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농상공부 관료, 대한제국 선유사로 충청남도에 파견되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유사로 파견되어 정미의병과 백성의 실태를 보고한 부분은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지만 보고문 자체가 소중한 역사 자료란 의의가 있다.
최병헌 (崔炳憲)
최병헌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 겸 신학자, 언론인, 정미의병 선유사로 활동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정동교회를 담임하여 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목회 활동뿐만 아니라 근대적 선각자로 한말 언론인,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농상공부 관료, 대한제국 선유사로 충청남도에 파견되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유사로 파견되어 정미의병과 백성의 실태를 보고한 부분은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지만 보고문 자체가 소중한 역사 자료란 의의가 있다.
평택대학교는 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피어슨성경기념학원을 설립하였다. 1981년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였고 1983년 대학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되었다. 피어선기념학원, 피어선대학 등을 거쳐 1996년에 평택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해외 10개국 24개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고 교환학생제, 학술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도서관·생활관 등의 부속기관과 정보디자인연구소·주한미군연구센터·피어선기념성경연구원 등의 부설연구소가 있다. 교훈은 ‘진리·정의·봉사’이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창의적 전문인 육성을 교육목적으로 한다.
평택대학교 (平澤大學校)
평택대학교는 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피어슨성경기념학원을 설립하였다. 1981년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였고 1983년 대학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되었다. 피어선기념학원, 피어선대학 등을 거쳐 1996년에 평택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해외 10개국 24개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고 교환학생제, 학술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도서관·생활관 등의 부속기관과 정보디자인연구소·주한미군연구센터·피어선기념성경연구원 등의 부설연구소가 있다. 교훈은 ‘진리·정의·봉사’이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창의적 전문인 육성을 교육목적으로 한다.
해방 이후 북한의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목사.
홍기주 (洪箕疇)
해방 이후 북한의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목사.
조선전기 영북진첨절제사, 길주목사,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하한 (河漢)
조선전기 영북진첨절제사, 길주목사, 중추원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윤기열 (尹基烈)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해방 이후 탈북자 인권운동에 투신한 목사. 인권운동가.
이서 (李犀)
해방 이후 탈북자 인권운동에 투신한 목사. 인권운동가.
『지영록』은 조선 후기의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의 시 · 제문 · 기행문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이익태는 1694년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업무 수행에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여 관청의 등록 등을 참고하여 제주도를 알리고자 편찬하였다. 자신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여정과 재임기간 중의 진상과 같은 업무와 행적도 기록하였다. ‘탐라십경’ 등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관과 지명에 대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제주 해역에서 발생한 외국인 표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해양 교류사, 표류민 송환 체제, 외국인과의 의사소통 등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이익태지영록 (李益泰知瀛錄)
『지영록』은 조선 후기의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의 시 · 제문 · 기행문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이익태는 1694년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업무 수행에 필요한 자료가 부족하여 관청의 등록 등을 참고하여 제주도를 알리고자 편찬하였다. 자신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여정과 재임기간 중의 진상과 같은 업무와 행적도 기록하였다. ‘탐라십경’ 등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관과 지명에 대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제주 해역에서 발생한 외국인 표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해양 교류사, 표류민 송환 체제, 외국인과의 의사소통 등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