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몽골_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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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우 (崔瑀)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광주산성전투 (廣州山城戰鬪)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1236년(고종 23) 개주에서 경별초(京別抄) 등이 몽골군과 벌인 전투.
개주전투 (价州戰鬪)
1236년(고종 23) 개주에서 경별초(京別抄) 등이 몽골군과 벌인 전투.
홍복원은 1231년(고종 18) 몽골군에 투항한 이후 몽골의 고려 침입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 부몽 관리이다.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하였고, 몽골로부터는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에 임명되어 요양·심양 등지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몽골에서 머물던 영녕공 왕준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고종 45)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 자손들에 의하여 부몽 행위는 계속되었다.
홍복원 (洪福源)
홍복원은 1231년(고종 18) 몽골군에 투항한 이후 몽골의 고려 침입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 부몽 관리이다.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하였고, 몽골로부터는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에 임명되어 요양·심양 등지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몽골에서 머물던 영녕공 왕준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고종 45)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 자손들에 의하여 부몽 행위는 계속되었다.
처인성전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제2차 침입(1232) 때 처인성에서 승장(僧將) 김윤후가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전투이다. 백현원의 승려였던 김윤후가 살례탑을 사살한 것은 처인성 안에 피란하였던 처인부곡민과 승려들의 적극적 호응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1232년 12월 16일의 일로 대몽전쟁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처인성전투 (處仁城戰鬪)
처인성전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제2차 침입(1232) 때 처인성에서 승장(僧將) 김윤후가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전투이다. 백현원의 승려였던 김윤후가 살례탑을 사살한 것은 처인성 안에 피란하였던 처인부곡민과 승려들의 적극적 호응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1232년 12월 16일의 일로 대몽전쟁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최춘명은 고려 후기에 자주부사로서 1231년(고종 18) 몽골 침입에 끝까지 저항하며 자주성을 방어한 관리이다. 당시 북계 지역 대부분이 몽골에 점령된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몽골과의 협상을 위하여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가 도리어 최우 세력에 의해 처형당할 뻔하였으나 몽골 관리에 의해 구명되었다. 자주성 방어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벼슬이 추밀원부사, 지추밀원사에까지 올랐다.
최춘명 (崔椿命)
최춘명은 고려 후기에 자주부사로서 1231년(고종 18) 몽골 침입에 끝까지 저항하며 자주성을 방어한 관리이다. 당시 북계 지역 대부분이 몽골에 점령된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몽골과의 협상을 위하여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가 도리어 최우 세력에 의해 처형당할 뻔하였으나 몽골 관리에 의해 구명되었다. 자주성 방어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벼슬이 추밀원부사, 지추밀원사에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