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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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묘청의 난 (妙淸의 亂)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평안남도 북동부 낭림산맥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하다가 남포특별시 부근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대동강 (大同江)
평안남도 북동부 낭림산맥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하다가 남포특별시 부근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고려시대의 구호기관.
대비원 (大悲院)
고려시대의 구호기관.
낭사는 고려시대 간쟁(諫諍), 봉박(封駁), 서경(署經)을 담당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간관이다. 고려는 왕조 사회로서 국왕이 국정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 정치에서 국왕의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국왕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비판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중서문하성에 낭사를 설치하였다. 어사대의 대관과 업무를 공유하며 국왕과 신료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청요직으로 인식되는 명예로운 관직이었고, 국왕의 근시로서 특권과 권한을 누렸다.
낭사 (郎舍)
낭사는 고려시대 간쟁(諫諍), 봉박(封駁), 서경(署經)을 담당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간관이다. 고려는 왕조 사회로서 국왕이 국정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 정치에서 국왕의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국왕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비판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중서문하성에 낭사를 설치하였다. 어사대의 대관과 업무를 공유하며 국왕과 신료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청요직으로 인식되는 명예로운 관직이었고, 국왕의 근시로서 특권과 권한을 누렸다.
고려시대에 서경에 설치된 원나라 통치기관.
동녕부 (東寧府)
고려시대에 서경에 설치된 원나라 통치기관.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조위총의 난 (趙位寵의 亂)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발해 일으킨 저항이다. 이 저항은 1173년(명종 3) 동계(東界) 김보당(金甫當)의 저항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 의식과 지방 사회의 폐단이 증폭되면서 촉발되었다. 저항 세력은 국도 개경(開京)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했지만, 1176년(명종 6) 조위총이 제거됨으로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반 민이 중심이 되어 저항을 이어갔다.
서경은 고려·조선 시대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 등에 있어 대간(臺諫)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이다. 대관과 간관이 문무 관리를 임명할 때 수직자(守職者)에게 발급하는 고신(告身) 서경과 중대 사안에 대해 서명하는 의첩(依牒) 서경으로 구분된다. 관리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과 개정 등이 국왕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반드시 대간이 동의하는 서명을 거치도록 하였다. 국왕이나 정조(政曹)에 의해 결정된 사항을 대간에서 다시 심사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여 부당한 인사나 업무 처리를 막는 기능을 하였다.
서경 (署經)
서경은 고려·조선 시대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 등에 있어 대간(臺諫)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이다. 대관과 간관이 문무 관리를 임명할 때 수직자(守職者)에게 발급하는 고신(告身) 서경과 중대 사안에 대해 서명하는 의첩(依牒) 서경으로 구분된다. 관리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과 개정 등이 국왕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반드시 대간이 동의하는 서명을 거치도록 하였다. 국왕이나 정조(政曹)에 의해 결정된 사항을 대간에서 다시 심사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여 부당한 인사나 업무 처리를 막는 기능을 하였다.
서경은 고려시대 옛 도읍지 평양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다. 태조 때 황폐해진 평양을 복구하고 서경을 설치하였다. 근본의 땅으로 인식되면서 개경과 함께 양경(兩京)을 구성하였다. 역대 국왕이 자주 순행(巡幸)하였으며, 이곳에서 정사를 볼 수 있도록 분사(分司)가 설치되었다. 인종 때 서경의 반란이 진압된 후 그 위상이 하락하여 지방 도시로 정착하였다.
서경 (西京)
서경은 고려시대 옛 도읍지 평양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다. 태조 때 황폐해진 평양을 복구하고 서경을 설치하였다. 근본의 땅으로 인식되면서 개경과 함께 양경(兩京)을 구성하였다. 역대 국왕이 자주 순행(巡幸)하였으며, 이곳에서 정사를 볼 수 있도록 분사(分司)가 설치되었다. 인종 때 서경의 반란이 진압된 후 그 위상이 하락하여 지방 도시로 정착하였다.
대화궁은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에 있는 고려 제17대 인종 당시 서경 임원역에 건설된 별궁이다. 음양설과 풍수지리설에서는 기운이 좋은 땅을 대화세, 대명지라고 한다. 궁의 이름도 대화궁, 대화궐이라 하였는데, 임원역에 세워져서 임원궁이란 별칭도 있었다. 대궐 안에는 정전인 건룡전과 팔성당이 있었다. 인종이 한때 이곳에 몸소 실행하여 잔치를 열고 서경으로의 천도를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나 서경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대화궁 (大花宮)
대화궁은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에 있는 고려 제17대 인종 당시 서경 임원역에 건설된 별궁이다. 음양설과 풍수지리설에서는 기운이 좋은 땅을 대화세, 대명지라고 한다. 궁의 이름도 대화궁, 대화궐이라 하였는데, 임원역에 세워져서 임원궁이란 별칭도 있었다. 대궐 안에는 정전인 건룡전과 팔성당이 있었다. 인종이 한때 이곳에 몸소 실행하여 잔치를 열고 서경으로의 천도를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나 서경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예조판서, 충청도관찰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유근 (柳根)
조선 중기에, 예조판서, 충청도관찰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묘청은 고려전기 정지상, 백수한 등의 지지로 서경천도론을 제기한 승려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35년(인종 13)에 사망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을 익힌 후 이를 바탕으로 상경은 이미 기운이 쇠했고 서경에는 왕기가 있으니 그곳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했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궁이 불타고 민심이 동요하던 상황에서 인종의 호응을 얻어 천도 준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제 천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조광·유참 등과 함께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묘청 (妙淸)
묘청은 고려전기 정지상, 백수한 등의 지지로 서경천도론을 제기한 승려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35년(인종 13)에 사망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을 익힌 후 이를 바탕으로 상경은 이미 기운이 쇠했고 서경에는 왕기가 있으니 그곳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했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궁이 불타고 민심이 동요하던 상황에서 인종의 호응을 얻어 천도 준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제 천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조광·유참 등과 함께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고려시대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 설치한 지방제도.
분사제도 (分司制度)
고려시대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 설치한 지방제도.
발해시대 5개의 수도.
오경 (五京)
발해시대 5개의 수도.
최광수는 고려 후기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군졸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경에서 구고려부흥병마사·금오위섭상장군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광수의 고구려부흥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최광수 (崔光秀)
최광수는 고려 후기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군졸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경에서 구고려부흥병마사·금오위섭상장군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광수의 고구려부흥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고려 후기에, 병부상서, 서경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조위총 (趙位寵)
고려 후기에, 병부상서, 서경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 후기 어사대의 기능을 이어받아 설치되었던 관청.
감찰사 (監察司)
고려 후기 어사대의 기능을 이어받아 설치되었던 관청.
발해시대의 대외교통로.
조공도 (朝貢道)
발해시대의 대외교통로.
서경천도론은 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고 칭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서경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이 서경천도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인종대에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성장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묘청과 정지상 등이 도참설에 기반하여 서경천도를 주도하였다.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와 왕권의 위상을 둘러싼 국내정세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 서경천도는 평양이 고려의 확실한 영역이자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경천도론 (西京遷都論)
서경천도론은 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고 칭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서경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이 서경천도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인종대에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성장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묘청과 정지상 등이 도참설에 기반하여 서경천도를 주도하였다.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와 왕권의 위상을 둘러싼 국내정세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 서경천도는 평양이 고려의 확실한 영역이자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공인은 고려 전기 호부원외랑,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자겸에 반대하고 묘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1116년(예종 11) 송나라 사행에서 귀국하면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고려에 전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문공인 (文公仁)
문공인은 고려 전기 호부원외랑,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자겸에 반대하고 묘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1116년(예종 11) 송나라 사행에서 귀국하면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고려에 전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대위(大爲)는 1135년(인종 13)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킨 뒤 서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의 국호이다. 고려의 금에 대한 사대정책을 반대하던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선언한 국호이다. 연호는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금에 맞서는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대위국 (大爲國)
대위(大爲)는 1135년(인종 13)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킨 뒤 서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의 국호이다. 고려의 금에 대한 사대정책을 반대하던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선언한 국호이다. 연호는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금에 맞서는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