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적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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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었던 3년제 전문대학, 2011년 8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하여 중앙대학교 간호학과와 통합되었으며, 2014년 3월 3년제 적십자간호대학은 편제가 종료됨.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 (中央大學校 赤十字看護大學)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었던 3년제 전문대학, 2011년 8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하여 중앙대학교 간호학과와 통합되었으며, 2014년 3월 3년제 적십자간호대학은 편제가 종료됨.
제네바협약에 따라 인명 구호 및 전쟁 피해자 구호 등을 활동을 주로 하는 국제적십자 산하 기구.
국제적십자위원회 (國際赤十字委員會)
제네바협약에 따라 인명 구호 및 전쟁 피해자 구호 등을 활동을 주로 하는 국제적십자 산하 기구.
남북대화는 대화를 통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해 실시하는 남북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회합이다. 분단 이후 남북한간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1960년대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 강화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다. 1990년대 남북한 간 국력 격차가 확연해지고 공산권이 붕괴하자 북한이 평화 공존을 수락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대화 (南北對話)
남북대화는 대화를 통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해 실시하는 남북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회합이다. 분단 이후 남북한간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1960년대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 강화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다. 1990년대 남북한 간 국력 격차가 확연해지고 공산권이 붕괴하자 북한이 평화 공존을 수락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남북한간의 고향방문사업.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南北離散家族 故鄕訪問)
남북적십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남북한간의 고향방문사업.
김상협은 고려대학교 총장, 문교부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관료이다. 1920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지내며 문교부 장관, 동아일보사 이사를 지냈다. 고려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고 198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대학적십자사 총재로 재임하며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고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을 성사하였다. 고려대 명예총장직을 수행하다 1995년 사망했다. 국민훈장모란장, 수교훈장 광화대장 등을 받았다.
김상협 (金相浹)
김상협은 고려대학교 총장, 문교부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관료이다. 1920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지내며 문교부 장관, 동아일보사 이사를 지냈다. 고려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고 198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대학적십자사 총재로 재임하며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고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을 성사하였다. 고려대 명예총장직을 수행하다 1995년 사망했다. 국민훈장모란장, 수교훈장 광화대장 등을 받았다.
7·4남북공동성명은 1972년 7월 4일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이다.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면서 개시되었다. 공동성명의 조국통일원칙은 자주적 통일,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 도모였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대화의 동력을 상실하였고, 같은 해 8월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거부하면서 종료됐다. 그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공동성명 이후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북한에서는 유일체제가 등장하였다.
7·4남북공동성명 (七四南北共同聲明)
7·4남북공동성명은 1972년 7월 4일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이다.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면서 개시되었다. 공동성명의 조국통일원칙은 자주적 통일,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 도모였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대화의 동력을 상실하였고, 같은 해 8월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거부하면서 종료됐다. 그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공동성명 이후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북한에서는 유일체제가 등장하였다.
북한에서, 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 역사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관료.
강석숭 (姜錫崇)
북한에서, 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 역사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관료.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1984년 8월 말과 9월 초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피해에 대해 북한이 남한 수재민들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한 일을 말한다. 당시 서울의 하루 최다 강우량은 294.8㎜로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었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었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였고 남한의 전두환 정부가 제의를 수락하였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그동안 막혔던 남북 간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
대남 수재물자 지원 (對南 水災物資 支援)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1984년 8월 말과 9월 초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피해에 대해 북한이 남한 수재민들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한 일을 말한다. 당시 서울의 하루 최다 강우량은 294.8㎜로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었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었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였고 남한의 전두환 정부가 제의를 수락하였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그동안 막혔던 남북 간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
오익표는 일제강점기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에 유학하였다. 1918년 귀국한 후 3·1운동 당시 공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충청도 의원, 상하이한인청년회 통신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러시아 연해주 소왕영(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조직된 전국청년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소성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오익표 (吳翼杓)
오익표는 일제강점기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에 유학하였다. 1918년 귀국한 후 3·1운동 당시 공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충청도 의원, 상하이한인청년회 통신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러시아 연해주 소왕영(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조직된 전국청년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소성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기룡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적십자사, 국민대표회의 등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재건된 대한적십자사, 시사책진회 등에 참여하였다.
이기룡 (李起龍)
이기룡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적십자사, 국민대표회의 등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재건된 대한적십자사, 시사책진회 등에 참여하였다.
이선경은 일제강점기 1920년 6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수원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하여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인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직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이선경 (李善卿)
이선경은 일제강점기 1920년 6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수원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하여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인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직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