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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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회회담은 남북한 국회간에 진행된 일련의 회담이다. 1984년 9월 북한의 대남 수해물자 지원을 계기로 남북국회회담이 시작되었다. 1985년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이 열렸으나 주요 의제의 의견 대립으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서울올림픽에 북한을 참가 시키기 위한 목적과 북한의 ‘남북국회연석회의’ 제의에서 비롯된 준비접촉이 있었으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2005년 평양의 6·15 통일축전을 계기로 남북 국회·정당간 교류협력 추진에 합의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2008년 제헌절 60주년 경축사를 통해 남북 국회회담 재개를 북측에 촉구했으나 북한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북국회회담 (南北國會會談)
남북국회회담은 남북한 국회간에 진행된 일련의 회담이다. 1984년 9월 북한의 대남 수해물자 지원을 계기로 남북국회회담이 시작되었다. 1985년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이 열렸으나 주요 의제의 의견 대립으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서울올림픽에 북한을 참가 시키기 위한 목적과 북한의 ‘남북국회연석회의’ 제의에서 비롯된 준비접촉이 있었으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2005년 평양의 6·15 통일축전을 계기로 남북 국회·정당간 교류협력 추진에 합의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2008년 제헌절 60주년 경축사를 통해 남북 국회회담 재개를 북측에 촉구했으나 북한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송요찬은 해방 이후 수도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918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48년 10월부터 제주 4·3사건 진압에 관여하였고 6·25 전쟁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4·19혁명 당시 계업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해 4·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군사정부의 요청에 따라 요직을 역임하였다.
송요찬 (宋堯讚)
송요찬은 해방 이후 수도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918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48년 10월부터 제주 4·3사건 진압에 관여하였고 6·25 전쟁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4·19혁명 당시 계업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해 4·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군사정부의 요청에 따라 요직을 역임하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고조된 대학생들의 투쟁 열기를 전국화하기 위해 발족한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1987.8.19∼1992). 약칭 ‘전대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
1987년 6월항쟁 이후 고조된 대학생들의 투쟁 열기를 전국화하기 위해 발족한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1987.8.19∼1992). 약칭 ‘전대협’.
남측의 통일부장관과 북측의 내각책임참사를 수석대표로 해 남북한의 전반적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회담.
남북장관급회담 (南北長官級會談)
남측의 통일부장관과 북측의 내각책임참사를 수석대표로 해 남북한의 전반적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회담.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 2007년 10월, 2018년 4월 남한과 북한의 최고당국자가 직접 만나 남북한의 현안을 포함한 제반문제에 대해 협의한 회담이다. 제1차는 2000년 6월 열렸다. 이 회담은 남북한 교류협력 활성화의 물꼬를 연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제2차는 2007년 10월 열렸다.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을 발표해 회담의 정례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제3차는 2018년 4월 열렸으며,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남북정상회담 (南北頂上會談)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 2007년 10월, 2018년 4월 남한과 북한의 최고당국자가 직접 만나 남북한의 현안을 포함한 제반문제에 대해 협의한 회담이다. 제1차는 2000년 6월 열렸다. 이 회담은 남북한 교류협력 활성화의 물꼬를 연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제2차는 2007년 10월 열렸다.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을 발표해 회담의 정례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제3차는 2018년 4월 열렸으며,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통일축전은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문' 발표 이후 개최되었던 남·북한 공동행사이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5개항의 ‘6.15 남북공동 선언문’을 도출해냈다. 이를 통해 민간 차원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북한 간의 공동행사를 통해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통일축전’이다. 남북 공동행사로서의 ‘통일축전’은 2001년 8월 2001민족통일대축전이 개최된 이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2007년까지 개최되었다. 2008년 이후에는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인해 더이상 개최되지 못하고 있다.
통일축전 (統一祝典)
통일축전은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문' 발표 이후 개최되었던 남·북한 공동행사이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5개항의 ‘6.15 남북공동 선언문’을 도출해냈다. 이를 통해 민간 차원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북한 간의 공동행사를 통해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통일축전’이다. 남북 공동행사로서의 ‘통일축전’은 2001년 8월 2001민족통일대축전이 개최된 이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2007년까지 개최되었다. 2008년 이후에는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인해 더이상 개최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가이다. 1950년대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대까지 정치인으로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2000년 12월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김대중 (金大中)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정치가이다. 1950년대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대까지 정치인으로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2000년 12월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북한의 선전 구호이다. 북한은 2000년 6·15공동선언 합의 직후부터 이 구호와 표현을 적극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남북 간 공조 및 연공(聯共)의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해결에서 자주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민족끼리 (우리民族끼리)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북한의 선전 구호이다. 북한은 2000년 6·15공동선언 합의 직후부터 이 구호와 표현을 적극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남북 간 공조 및 연공(聯共)의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해결에서 자주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