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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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고구려는 서기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예·맥족은 물론 옥저·동예·부여·조선 등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하면서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중국 한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의 군현이 설치되는 등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국력이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내부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승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고구려 (高句麗)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고구려는 서기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예·맥족은 물론 옥저·동예·부여·조선 등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하면서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중국 한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의 군현이 설치되는 등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국력이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내부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승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자립해 세운 나라. # 내용 역사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나, 원래의 고구려나 궁예(弓裔)의 후고구려 및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소고구려라 칭한다. 소고구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818년에 당나라에 조공한 기사를 포함해 몇몇 극히 단편적인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성립 배경과 과정 및 국가의 구조나 성격 등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의 정치적 상황의 추이와 이 지역 유민의 동향 및 요동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동 등을 통해 소고구려국의 성립과 소멸 과정을 개괄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요동지역은 고구려인들이 수백 년간 토착해 온 지역이다. 이...
소고구려 (小高句麗)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자립해 세운 나라. # 내용 역사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나, 원래의 고구려나 궁예(弓裔)의 후고구려 및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소고구려라 칭한다. 소고구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818년에 당나라에 조공한 기사를 포함해 몇몇 극히 단편적인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성립 배경과 과정 및 국가의 구조나 성격 등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역의 정치적 상황의 추이와 이 지역 유민의 동향 및 요동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동 등을 통해 소고구려국의 성립과 소멸 과정을 개괄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요동지역은 고구려인들이 수백 년간 토착해 온 지역이다. 이...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유민의 제반 활동.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은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유민의 제반 활동이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당나라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유민도 나타났다. 검모잠과 안승은 한성을 중심으로 왕국의 재건을 추구하였다. 두만강과 송화강 유역 그리고 요동 지역의 고구려 주요 거점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한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673년 말까지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에서 대패하며 재기하지 못하였다. 각지의 부흥운동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한층 거세진 것이다. 유민의 저항은 고구려 각지에서 나타났는데,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고구려 부흥운동 (高句麗 復興運動)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유민의 제반 활동.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은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유민의 제반 활동이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당나라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유민도 나타났다. 검모잠과 안승은 한성을 중심으로 왕국의 재건을 추구하였다. 두만강과 송화강 유역 그리고 요동 지역의 고구려 주요 거점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한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673년 말까지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에서 대패하며 재기하지 못하였다. 각지의 부흥운동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한층 거세진 것이다. 유민의 저항은 고구려 각지에서 나타났는데,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사동구역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나무 다리. 나무다리터. # 역사적 변천 고구려나무다리는 5세기 초 안학궁 앞쪽에 설치되었다. # 내용 고구려나무다리는 총길이가 375m, 너비가 9m였다. 다리골조 부재는 길이 8∼10m, 너비 38㎝, 두께 26㎝인 굵은 나무각재들을 사용하였다. 발굴된 유적에 기초하여 고구려나무다리의 모습을 추정해보면, 다리의 입구부분을 부챗살모양으로 하고 깔판을 빼곡히 깔아 다니기 편하게 하였고, 다리의 본체 위에는 세로 보와 가로 보를 놓고 그 위에 두꺼운 깔판을 가지런히 깔아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의 입구와 본체 가장자리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에 안전성을 확보하였다. 다리의 기둥은 듬직한 각재로 귀틀을 짜고 그 안에 돌을 넣어 세웠다....
고구려 나무다리 (高句麗 나무다리)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사동구역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나무 다리. 나무다리터. # 역사적 변천 고구려나무다리는 5세기 초 안학궁 앞쪽에 설치되었다. # 내용 고구려나무다리는 총길이가 375m, 너비가 9m였다. 다리골조 부재는 길이 8∼10m, 너비 38㎝, 두께 26㎝인 굵은 나무각재들을 사용하였다. 발굴된 유적에 기초하여 고구려나무다리의 모습을 추정해보면, 다리의 입구부분을 부챗살모양으로 하고 깔판을 빼곡히 깔아 다니기 편하게 하였고, 다리의 본체 위에는 세로 보와 가로 보를 놓고 그 위에 두꺼운 깔판을 가지런히 깔아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의 입구와 본체 가장자리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에 안전성을 확보하였다. 다리의 기둥은 듬직한 각재로 귀틀을 짜고 그 안에 돌을 넣어 세웠다....
고구려시대 평양 일원에 성벽을 쌓을 때 각자(刻字)한 성석의 파편. 지금까지 평양의 고구려시대 벽에서 각자된 성석은 모두 4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성석은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발견 지점은 1766년(영조 42) 김정희(金正喜)가 평양성 외성(外城) 오탄(烏灘) 아래에서 발견한 기축년명(己丑年銘) 성석과 거의 같은 지점으로 전하는데, 1829년(순조 29) 큰비로 성벽이 무너짐에 따라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1855년(철종 6) 오경석(吳慶錫)이 입수한 것을 아들 오세창(吳世昌)이 보관해 오다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다. 명문은 7행 27자(자경 약 3㎝)로, 내용은 “기유년(己酉年) 5월 21일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소형(物省小兄) 배백두(俳百頭)가 지휘감독하여 쌓다.”라는 내용이다. 명문...
고구려 평양성 석편 (高句麗 平壤城 石片)
고구려시대 평양 일원에 성벽을 쌓을 때 각자(刻字)한 성석의 파편. 지금까지 평양의 고구려시대 벽에서 각자된 성석은 모두 4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성석은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발견 지점은 1766년(영조 42) 김정희(金正喜)가 평양성 외성(外城) 오탄(烏灘) 아래에서 발견한 기축년명(己丑年銘) 성석과 거의 같은 지점으로 전하는데, 1829년(순조 29) 큰비로 성벽이 무너짐에 따라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1855년(철종 6) 오경석(吳慶錫)이 입수한 것을 아들 오세창(吳世昌)이 보관해 오다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다. 명문은 7행 27자(자경 약 3㎝)로, 내용은 “기유년(己酉年) 5월 21일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소형(物省小兄) 배백두(俳百頭)가 지휘감독하여 쌓다.”라는 내용이다. 명문...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역 안에서 축조된 무덤. 고구려고분(高句麗古墳)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역 안에서 축조된 무덤이다. 전기에는 적석총이 주로 축조되었고, 후기에는 봉토분이 주로 축조되었다. 봉토분 가운데 매장부인 석실에 벽화를 그린 석실벽화봉토분이 있다. 초기 벽화에는 주로 생활풍속도가 그려졌고, 후기에는 사신도가 그려졌다.# 개설 고구려고분은 분구를 기준으로 적석총[^1], 봉토분[^2]으로 나뉜다. 적석총은 지상에 돌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후 그 위에 다시 돌을 덮어 매장한 무덤으로, 매장부가 돌무지 분구 가운데 자리하게 되는 분구묘의 한 형태이다. 봉토분은 흙으로 분구를 쌓은 무덤으로, 분구는 대개 방대형이며, 매장부는 대개 횡혈식 장법의 석실이다. 봉토분을 대표하는 것은 벽화분이다. 벽화분은...
고구려 고분 (高句麗 古墳)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역 안에서 축조된 무덤. 고구려고분(高句麗古墳)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역 안에서 축조된 무덤이다. 전기에는 적석총이 주로 축조되었고, 후기에는 봉토분이 주로 축조되었다. 봉토분 가운데 매장부인 석실에 벽화를 그린 석실벽화봉토분이 있다. 초기 벽화에는 주로 생활풍속도가 그려졌고, 후기에는 사신도가 그려졌다.# 개설 고구려고분은 분구를 기준으로 적석총[^1], 봉토분[^2]으로 나뉜다. 적석총은 지상에 돌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후 그 위에 다시 돌을 덮어 매장한 무덤으로, 매장부가 돌무지 분구 가운데 자리하게 되는 분구묘의 한 형태이다. 봉토분은 흙으로 분구를 쌓은 무덤으로, 분구는 대개 방대형이며, 매장부는 대개 횡혈식 장법의 석실이다. 봉토분을 대표하는 것은 벽화분이다. 벽화분은...
고구려시대의 요동 평원에서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교통로. 한편, 남도가 국내성∼요동지역의 전통적인 교통로, 북도는 고구려∼부여 및 요동∼부여 교통로의 일부가 합해진 오래된 경로라는 사실에 착안해 4세기경 남도·북도 등 각 방면 교통로를 매개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던 모습을 밝힌 연구성과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여호규, 『한국사연구』 91, 1995) - 「고구려의 남도·북도와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손영종, 『역사과학』 1989-3·4, 1989) - 『東北歷史地理』 二( 孫進己·馮永謙,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東北古代交通』(王綿厚·李健才, 瀋陽出版社, 1988) - 「高句麗南北道新探」(梁志龍, 『社會科學戰線』73, 1995)...
고구려 남도 (高句麗 南道)
고구려시대의 요동 평원에서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교통로. 한편, 남도가 국내성∼요동지역의 전통적인 교통로, 북도는 고구려∼부여 및 요동∼부여 교통로의 일부가 합해진 오래된 경로라는 사실에 착안해 4세기경 남도·북도 등 각 방면 교통로를 매개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던 모습을 밝힌 연구성과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여호규, 『한국사연구』 91, 1995) - 「고구려의 남도·북도와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손영종, 『역사과학』 1989-3·4, 1989) - 『東北歷史地理』 二( 孫進己·馮永謙,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東北古代交通』(王綿厚·李健才, 瀋陽出版社, 1988) - 「高句麗南北道新探」(梁志龍, 『社會科學戰線』73, 1995)...
고구려시대의 요동 평원에서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교통로. →고구려남도 - 「고구려의 남도·북도와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손영종, 『역사과학』 1989-3·4, 1989) -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여호규, 『한국사연구』 91, 1995) -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集安縣文物管理所, 『考古』 1964-2) - 『東北古代交通』(王綿厚·李健才, 瀋陽出版社, 1988) - 『東北歷史地理』 二( 孫進己·馮永謙,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達, 『博物館硏究』 1993-3) - 「高句麗南北道新探」(梁志龍, 『社會科學戰線』1995-1) -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今西春秋, 『靑丘學叢』22, 1935) - 「高句麗時代の新城木底城及び南蘇城について」...
고구려 북도 (高句麗 北道)
고구려시대의 요동 평원에서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교통로. →고구려남도 - 「고구려의 남도·북도와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손영종, 『역사과학』 1989-3·4, 1989) -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여호규, 『한국사연구』 91, 1995) -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集安縣文物管理所, 『考古』 1964-2) - 『東北古代交通』(王綿厚·李健才, 瀋陽出版社, 1988) - 『東北歷史地理』 二( 孫進己·馮永謙,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達, 『博物館硏究』 1993-3) - 「高句麗南北道新探」(梁志龍, 『社會科學戰線』1995-1) -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今西春秋, 『靑丘學叢』22, 1935) - 「高句麗時代の新城木底城及び南蘇城について」...
고구려의 운수가 다하여 늙은 장군에게 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적 내용의 도참서. 참위서. 이 비기의 내용이 어떤 것들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단지 고구려의 운수가 다하여 늙은 장군에게 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적 내용만이 전해진다. 668년(보장왕 27) 요동전선을 살펴보고 돌아간 당나라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은 전쟁의 승산에 대해 고종(高宗)이 묻자 당나라의 승리 가능성을 말하는 중에 ≪고구려비기≫에도 고구려가 망하게 된다는 예언이 있음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전하고 있는 ≪당회요≫와 ≪신당서≫의 기사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당회요≫에서는 “천년에 못 미쳐 80세의 노장군이 와서 멸망시킨다(不及千年 當有八十老將來滅之).”라고 하였는데, ≪신당서≫와 이를 옮기고 있는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비기 (高句麗秘記)
고구려의 운수가 다하여 늙은 장군에게 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적 내용의 도참서. 참위서. 이 비기의 내용이 어떤 것들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단지 고구려의 운수가 다하여 늙은 장군에게 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적 내용만이 전해진다. 668년(보장왕 27) 요동전선을 살펴보고 돌아간 당나라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은 전쟁의 승산에 대해 고종(高宗)이 묻자 당나라의 승리 가능성을 말하는 중에 ≪고구려비기≫에도 고구려가 망하게 된다는 예언이 있음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전하고 있는 ≪당회요≫와 ≪신당서≫의 기사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당회요≫에서는 “천년에 못 미쳐 80세의 노장군이 와서 멸망시킨다(不及千年 當有八十老將來滅之).”라고 하였는데, ≪신당서≫와 이를 옮기고 있는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시대의 중요한 3개의 수도. # 내용 고구려 3경(三京)은 평양성(平壤城)·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을 지칭한다. 평양성 지역은 일찍이 고조선(古朝鮮) 후·말기의 중심지였던 곳이고, 고조선이 망한 뒤 한족(漢族)이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의 중심지가 되어 황해 연안의 중요 무역기지로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313년경 이 지역을 한족으로부터 탈환했으며, 344년(고국원왕 4)에 평양성을 증축한 것으로 나타난다. 353년(고국원왕 13)에 전연(前燕)의 침입(342)으로 황폐화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이거(移居) 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393년(광개토왕 2)에 평양에 9사(九寺)를 창건한 사실 역시 이미 평양지역으로의 귀족세력 이주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409년(광개토왕 18)에 평양성 민호(民戶)의 국동(國東) 6성(城)으로의 이주는...
고구려 삼경 (高句麗 三京)
고구려시대의 중요한 3개의 수도. # 내용 고구려 3경(三京)은 평양성(平壤城)·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을 지칭한다. 평양성 지역은 일찍이 고조선(古朝鮮) 후·말기의 중심지였던 곳이고, 고조선이 망한 뒤 한족(漢族)이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의 중심지가 되어 황해 연안의 중요 무역기지로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313년경 이 지역을 한족으로부터 탈환했으며, 344년(고국원왕 4)에 평양성을 증축한 것으로 나타난다. 353년(고국원왕 13)에 전연(前燕)의 침입(342)으로 황폐화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이거(移居) 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393년(광개토왕 2)에 평양에 9사(九寺)를 창건한 사실 역시 이미 평양지역으로의 귀족세력 이주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409년(광개토왕 18)에 평양성 민호(民戶)의 국동(國東) 6성(城)으로의 이주는...
평양성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석사자상. # 내용 고구려 석사자상은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로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자는 용맹하고 위엄 있는 동물로 일찍부터 동 · 서양의 고대 미술에 표현되어 힘과 신성의 상징으로 쓰였다.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서식하지 않으나,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자상도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조를 보면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을 이용해 적을 위협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자장정률(慈藏定律條)’조에는 문수보살이 사자보좌(獅子寶座) 위에 앉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한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불상의 대좌에 사자를 표현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고구려 석사자 (高句麗 石獅子)
평양성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석사자상. # 내용 고구려 석사자상은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로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자는 용맹하고 위엄 있는 동물로 일찍부터 동 · 서양의 고대 미술에 표현되어 힘과 신성의 상징으로 쓰였다.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서식하지 않으나,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자상도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조를 보면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을 이용해 적을 위협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자장정률(慈藏定律條)’조에는 문수보살이 사자보좌(獅子寶座) 위에 앉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한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불상의 대좌에 사자를 표현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 고구려오부는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이다. 『삼국지』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내용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를 일컫는다. 『삼국지(三國志)』^1] 등 중국 문헌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고구려 오부 (高句麗 五部)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 고구려오부는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이다. 『삼국지』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내용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를 일컫는다. 『삼국지(三國志)』^1] 등 중국 문헌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제작 및 사용된 토기. 고구려토기(高句麗土器)는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제작 및 사용된 토기이다. 평저기형, 니질태토, 대상파수 등을 특징으로 한다. 대략 30여 개 기종이 있으며, 저장용, 조리용, 배식용, 운반용 등의 실용기와 부장용, 의례용 등의 비실용기로 구분된다.# 개설 고구려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기종이 납작바닥〔平低〕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니질(泥質, 고운 점토질)이 주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백제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와 다른 점이다. 또한 항아리 · 독류는 목과 아가리가 발달되었다는 점과 항아리 · 독류 및 동이류, 시루류 등에 띠 모양의 손잡이인 대상파수(帶狀把手)가 부착된다는 점도 고구려토기의 특징이다. 고구려토기는 대략 30여 개 기종으로...
고구려토기 (高句麗土器)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제작 및 사용된 토기. 고구려토기(高句麗土器)는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제작 및 사용된 토기이다. 평저기형, 니질태토, 대상파수 등을 특징으로 한다. 대략 30여 개 기종이 있으며, 저장용, 조리용, 배식용, 운반용 등의 실용기와 부장용, 의례용 등의 비실용기로 구분된다.# 개설 고구려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기종이 납작바닥〔平低〕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니질(泥質, 고운 점토질)이 주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백제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와 다른 점이다. 또한 항아리 · 독류는 목과 아가리가 발달되었다는 점과 항아리 · 독류 및 동이류, 시루류 등에 띠 모양의 손잡이인 대상파수(帶狀把手)가 부착된다는 점도 고구려토기의 특징이다. 고구려토기는 대략 30여 개 기종으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17대 소수림왕 당시 창건된 고구려 최초의 사찰. # 내용 위치는 미상이다.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승려를 통해서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보낸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효시가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375년(소수림왕 5)에 왕은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을 짓고 순도를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373년(소수림왕 3)에 왕이 성문사(省門寺)를 짓고 순도를 머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초문사는 『해동고승전』에 등장하는 성문사의 오식으로 보기도 한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고구려 성문사 (高句麗 省門寺)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17대 소수림왕 당시 창건된 고구려 최초의 사찰. # 내용 위치는 미상이다.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승려를 통해서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보낸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효시가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375년(소수림왕 5)에 왕은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을 짓고 순도를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373년(소수림왕 3)에 왕이 성문사(省門寺)를 짓고 순도를 머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초문사는 『해동고승전』에 등장하는 성문사의 오식으로 보기도 한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시대에 창건된 고구려 최초의 사찰. # 내용 이불란사(伊弗蘭寺)는 4세기 후반에 건립된 고구려 최초의 사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다. 또한 374년(소수림왕 4)에 아도(阿道)가 진(晉) 나라에서 왔으므로 이듬해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불란사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고 공인되면서 초문사와 함께 처음으로 건립된 사찰이다. 소수림왕 시기에 고구려가 전진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던 배경에는 고구려와 전진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작용하였다. 즉 370년(고국원왕 40)에 전진에 의해 연이...
고구려 이불란사 (高句麗 伊弗蘭寺)
삼국시대에 창건된 고구려 최초의 사찰. # 내용 이불란사(伊弗蘭寺)는 4세기 후반에 건립된 고구려 최초의 사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다. 또한 374년(소수림왕 4)에 아도(阿道)가 진(晉) 나라에서 왔으므로 이듬해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불란사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고 공인되면서 초문사와 함께 처음으로 건립된 사찰이다. 소수림왕 시기에 고구려가 전진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던 배경에는 고구려와 전진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작용하였다. 즉 370년(고국원왕 40)에 전진에 의해 연이...
고구려의 수도 집안과 평양에서 출토된 금동관. 조우관. # 개설 고구려 유적에서 금관은 출토된 바 없고 금동관이 관식(冠飾)과 더불어 몇 점 출토되었다. 고구려 금동관은 사서에 등장하는 ‘조우관(鳥羽冠)’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현재 고구려의 금동관은 중국, 북한, 남한 박물관에 각기 분산 소장되어 있고 관련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 연원 및 변천 한족(漢族)이나 선비족(鮮卑族)의 문물에서 계보를 찾기 어려우며, 동북아시아 조우관의 여러 형식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조우관의 출토 예가 적어 변천 양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 내용 고구려의 금동관 가운데 다음의 3점이 대표적이다. 첫째, 중국 집안(集安) 출토품으로 전하는 요녕성박물관 소장 관식이다. 이 관식은 중간 세움장식〔立飾〕의 가장자리를 끌로 오려...
고구려금동관 (高句麗金銅冠)
고구려의 수도 집안과 평양에서 출토된 금동관. 조우관. # 개설 고구려 유적에서 금관은 출토된 바 없고 금동관이 관식(冠飾)과 더불어 몇 점 출토되었다. 고구려 금동관은 사서에 등장하는 ‘조우관(鳥羽冠)’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현재 고구려의 금동관은 중국, 북한, 남한 박물관에 각기 분산 소장되어 있고 관련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 연원 및 변천 한족(漢族)이나 선비족(鮮卑族)의 문물에서 계보를 찾기 어려우며, 동북아시아 조우관의 여러 형식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조우관의 출토 예가 적어 변천 양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 내용 고구려의 금동관 가운데 다음의 3점이 대표적이다. 첫째, 중국 집안(集安) 출토품으로 전하는 요녕성박물관 소장 관식이다. 이 관식은 중간 세움장식〔立飾〕의 가장자리를 끌로 오려...
조선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고구려무」는 고구려시대의 춤이 아니고, 고구려와 연관된 옛 시를 창사로 부르면서 옛날을 회상하는 춤이다. 창사는 다음과 같다. 금화 절풍모 쓰고/백마로 더디 도네/번득이는 넓은 소매/해동에 새가 온 듯하네(花折風帽 白馬少遲回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 이 시는 순조 무자(戊子)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의하면 수나라 양제(煬帝)가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고구려 사람들의 춤을 보고 지은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와 관련된 시임에는 틀림없다. 고종 계사(癸巳)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고구려무」의 춤추며 상대하는 절차는 「엽무(葉舞)」와 같다고 되어 있다. 「엽무」는 「첨수무(尖袖舞)」의 속칭으로 영조 때 고쳐...
고구려무 (高句麗舞)
조선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고구려무」는 고구려시대의 춤이 아니고, 고구려와 연관된 옛 시를 창사로 부르면서 옛날을 회상하는 춤이다. 창사는 다음과 같다. 금화 절풍모 쓰고/백마로 더디 도네/번득이는 넓은 소매/해동에 새가 온 듯하네(花折風帽 白馬少遲回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 이 시는 순조 무자(戊子)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의하면 수나라 양제(煬帝)가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고구려 사람들의 춤을 보고 지은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와 관련된 시임에는 틀림없다. 고종 계사(癸巳)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고구려무」의 춤추며 상대하는 절차는 「엽무(葉舞)」와 같다고 되어 있다. 「엽무」는 「첨수무(尖袖舞)」의 속칭으로 영조 때 고쳐...
삼국시대 고구려의 언어. # 내용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부여 · 옥저 · 예 등의 언어와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부여어군이라 부를 수 있다. 부여어군의 언어들은 모두 사멸되었지만, 그 가운데 고구려어는 약간의 자료를 남겼을 뿐 아니라, 중세국어의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그 흔적이 국어 속에 남아 있다. 중세국어는 고려 초엽에 형성되었는데, 그 토대가 된 개경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많건 적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중세국어의 ‘나믈(那勿=鉛)’과 ‘ᄐᆞᆫ(呑=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과 ≪조선관역어 朝鮮館譯語≫에 각각 보이는데, 고구려어에서 온 것으로 믿어진다. 고구려어에 ‘乃勿(鉛)‘과 ‘呑(谷)‘이 있었던...
고구려어 (高句麗語)
삼국시대 고구려의 언어. # 내용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부여 · 옥저 · 예 등의 언어와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부여어군이라 부를 수 있다. 부여어군의 언어들은 모두 사멸되었지만, 그 가운데 고구려어는 약간의 자료를 남겼을 뿐 아니라, 중세국어의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그 흔적이 국어 속에 남아 있다. 중세국어는 고려 초엽에 형성되었는데, 그 토대가 된 개경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많건 적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중세국어의 ‘나믈(那勿=鉛)’과 ‘ᄐᆞᆫ(呑=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과 ≪조선관역어 朝鮮館譯語≫에 각각 보이는데, 고구려어에서 온 것으로 믿어진다. 고구려어에 ‘乃勿(鉛)‘과 ‘呑(谷)‘이 있었던...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석실분. 제1·2호분이 모줄임식 천장구조를 하고 있는 점과, 흑색 · 회색의 연질토기편이 제2호분의 돌방 바닥, 제1·2호분의 사이, 그리고 제1호분 앞에서 발견되어 두 무덤을 고구려계 돌방무덤으로 보게 되었다. # 의의와 평가 방동리 고구려고분의 돌방무덤은 남한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통구(通溝)나 평양 지역의 고구려 돌방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다. 이른바 봉토돌방무덤의 전통이 북방 고구려에서 춘천 지역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한 형태이다. 제1·2호분의 상관관계는 봉토의 층위로 볼 때, 제1호분보다 제2호분이 먼저 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본 형식이 동일한데도 제2호분이...
방동리 고구려 고분 (芳洞里 高句麗 古墳)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석실분. 제1·2호분이 모줄임식 천장구조를 하고 있는 점과, 흑색 · 회색의 연질토기편이 제2호분의 돌방 바닥, 제1·2호분의 사이, 그리고 제1호분 앞에서 발견되어 두 무덤을 고구려계 돌방무덤으로 보게 되었다. # 의의와 평가 방동리 고구려고분의 돌방무덤은 남한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통구(通溝)나 평양 지역의 고구려 돌방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다. 이른바 봉토돌방무덤의 전통이 북방 고구려에서 춘천 지역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한 형태이다. 제1·2호분의 상관관계는 봉토의 층위로 볼 때, 제1호분보다 제2호분이 먼저 시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본 형식이 동일한데도 제2호분이...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돌칸흙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 개설 대성산고구려고분군은 고구려가 평양지방에 진출한 3세기 경부터 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형성된 것이다. 고분군에는 돌무지무덤과 돌칸흙무덤이 있다. 돌무지무덤은 대성산 서쪽과 남쪽 산중턱에서 산기슭에 이르는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 내용 대성산은 고구려시대의 왕궁지인 안학궁터와 궁성을 수호하던 대성산성이 있어 산 전체가 고구려의 유적지이다. 대성산 일대의 대고분군에 속하는 무덤군은 약 2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무덤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제1호 고분은 봉분이 방대형으로 그 한 변의 길이가 20m가 넘는다. 대성산 부근의 무덤들은 대부분 돌칸흙무덤(石室封土무덤)이다. 돌칸흙무덤의...
대성산 고구려 고분군 (大聖山 高句麗 古墳群)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돌칸흙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 개설 대성산고구려고분군은 고구려가 평양지방에 진출한 3세기 경부터 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형성된 것이다. 고분군에는 돌무지무덤과 돌칸흙무덤이 있다. 돌무지무덤은 대성산 서쪽과 남쪽 산중턱에서 산기슭에 이르는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 내용 대성산은 고구려시대의 왕궁지인 안학궁터와 궁성을 수호하던 대성산성이 있어 산 전체가 고구려의 유적지이다. 대성산 일대의 대고분군에 속하는 무덤군은 약 2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무덤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제1호 고분은 봉분이 방대형으로 그 한 변의 길이가 20m가 넘는다. 대성산 부근의 무덤들은 대부분 돌칸흙무덤(石室封土무덤)이다. 돌칸흙무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