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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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은 일제강점기 때, 대회파 공산당 책임비서, 사회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강나후렌치, 권성만, 김용칠, 김와시리, 백인석, 술리모프 등으로도 불렸다. 1922년 국립고등소학교에 재학 중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았다. 1927년 간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경성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과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을 맡았다. 1946년 사회노동당 준비위원으로 이북을 방문 후 11월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50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강진 (姜進)
강진은 일제강점기 때, 대회파 공산당 책임비서, 사회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강나후렌치, 권성만, 김용칠, 김와시리, 백인석, 술리모프 등으로도 불렸다. 1922년 국립고등소학교에 재학 중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았다. 1927년 간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경성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과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을 맡았다. 1946년 사회노동당 준비위원으로 이북을 방문 후 11월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50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은호는 해방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법조원로원 회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1918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1952년 제1회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했다. 1964년 3.24 데모로 구속된 김중태의 무료 변론을 시작으로 구속 학생들의 변론과 석방 서명운동 등을 펼쳤다. 서울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법조원로회 회장,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법체계의 민주화 작업, 인권 문제 해결, 인권위원회의 활동 등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인권 변호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명덕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김은호 (金殷鎬)
김은호는 해방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법조원로원 회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1918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1952년 제1회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했다. 1964년 3.24 데모로 구속된 김중태의 무료 변론을 시작으로 구속 학생들의 변론과 석방 서명운동 등을 펼쳤다. 서울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법조원로회 회장,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법체계의 민주화 작업, 인권 문제 해결, 인권위원회의 활동 등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인권 변호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명덕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김택현은 해방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1915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으로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 사법관시보실무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활동하다가 판사로 임명되었다. 1964년 변호사 개업 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7년 장준하의 변호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2월 동백림사건 변호를 맡았으며,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장과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정부로부터 인권옹호유공자로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고, 1986년 사망했다.
김택현 (金澤鉉)
김택현은 해방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1915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으로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 사법관시보실무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활동하다가 판사로 임명되었다. 1964년 변호사 개업 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7년 장준하의 변호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2월 동백림사건 변호를 맡았으며,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장과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정부로부터 인권옹호유공자로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고, 1986년 사망했다.
김현철은 재무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주미대사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외교관이다. 1901년 서울 출생으로, 이승만의 요청으로 아메리칸대학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전 후 귀국하여 재무부 장관, IMF 대표위원,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화폐 개혁 등을 주도했으며, 대통령 전권특사로 40개국을 친선 방문했다. 주미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와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5·16장학회 이사장,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청조소성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김현철 (金顯哲)
김현철은 재무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주미대사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외교관이다. 1901년 서울 출생으로, 이승만의 요청으로 아메리칸대학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전 후 귀국하여 재무부 장관, IMF 대표위원,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화폐 개혁 등을 주도했으며, 대통령 전권특사로 40개국을 친선 방문했다. 주미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와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5·16장학회 이사장,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청조소성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재단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자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이다. 교육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1899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학졸업자이며 미국에 유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3·1운동 비밀결사에 참여하고 YWCA를 창설했으며 여성운동과 개신교 활동에 전념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친일활동에 가담하여 각종 단체를 결성하거나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일제의 조선인 동원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해방 후에는 교육자·여성운동가·종교활동가로 활약했다.
김활란 (金活蘭)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재단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자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이다. 교육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1899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학졸업자이며 미국에 유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3·1운동 비밀결사에 참여하고 YWCA를 창설했으며 여성운동과 개신교 활동에 전념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친일활동에 가담하여 각종 단체를 결성하거나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일제의 조선인 동원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해방 후에는 교육자·여성운동가·종교활동가로 활약했다.
이영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위원, 조선공산당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대표단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관료·독립운동가이다. 1889년에 출생하여 1960년 사망했다. 중국 남경의 강녕제일실업학교 재학 중 조선광복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0년 귀국 후 1923년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5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6년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서 소련을 방문했다.
이영 (李英)
이영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위원, 조선공산당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대표단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관료·독립운동가이다. 1889년에 출생하여 1960년 사망했다. 중국 남경의 강녕제일실업학교 재학 중 조선광복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0년 귀국 후 1923년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5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6년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서 소련을 방문했다.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2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법학교 유학 시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4년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하였으며, 1939년 ‘경섬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작성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이관술 (李觀述)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2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법학교 유학 시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4년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하였으며, 1939년 ‘경섬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작성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이종찬은 해방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군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83년에 사망했다. 193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 조선인장교로서는 유일하게 공5급 금치훈장을 받았다. 일본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뉴기니에 억류되었다가 해방 이후 귀국했다.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1960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아 3.15부정선거에 동조한 군인들을 숙청하였다. 이후 국회위원과 재향군인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이종찬 (李鍾贊)
이종찬은 해방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군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16년에 태어나 1983년에 사망했다. 193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 조선인장교로서는 유일하게 공5급 금치훈장을 받았다. 일본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뉴기니에 억류되었다가 해방 이후 귀국했다.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1960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0년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아 3.15부정선거에 동조한 군인들을 숙청하였다. 이후 국회위원과 재향군인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김제노농동맹회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조기승 (趙紀勝)
일제강점기 김제노농동맹회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기호흥학과찬무원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허진 (許璡)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기호흥학과찬무원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한창우는 해방 이후 경향신문사 사장, 대한신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1947년 4월 경향신문사 경리부장 겸 비서실장으로 입사했다. 1947년 10월 부사장, 1949년 제2대 사장에 취임해 1961년 6월까지 재임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북진했을 때 신문사 최초로 전선판을 평양에서 발행했다. 1961년 6월 경향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61년 8월 장면 측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혁명 사건’의 하나인 ‘선우종원·한창우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 취하로 9월 11일 출감했다.
한창우 (韓昌愚)
한창우는 해방 이후 경향신문사 사장, 대한신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1947년 4월 경향신문사 경리부장 겸 비서실장으로 입사했다. 1947년 10월 부사장, 1949년 제2대 사장에 취임해 1961년 6월까지 재임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북진했을 때 신문사 최초로 전선판을 평양에서 발행했다. 1961년 6월 경향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61년 8월 장면 측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혁명 사건’의 하나인 ‘선우종원·한창우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 취하로 9월 11일 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