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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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력은 822년 당나라 서앙이 편찬한 역법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 사용된 역법이다. 『대연력(大衍曆)』 이후 가장 훌륭한 역법이라고 칭하던 『선명력』은 당에서 823년부터 893년까지 71년간 시행되었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터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이 처음 도입된 고려의 충선왕 원년인 1309년 이전까지 사용되었으며, 일월식(日月食)과 오행성(五行星)의 계산 방법은 조선 초까지 사용되었다.
선명력 (宣明曆)
선명력은 822년 당나라 서앙이 편찬한 역법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 사용된 역법이다. 『대연력(大衍曆)』 이후 가장 훌륭한 역법이라고 칭하던 『선명력』은 당에서 823년부터 893년까지 71년간 시행되었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터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이 처음 도입된 고려의 충선왕 원년인 1309년 이전까지 사용되었으며, 일월식(日月食)과 오행성(五行星)의 계산 방법은 조선 초까지 사용되었다.
중수대명력은 1171년(명종 1) 금나라의 조지미가 양급의 『대명력(大明曆)』을 중수하여 편찬한 역법이다. 요나라 가준의 『대명력』과 북송의 『기원력(紀元曆)』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금에서는 1182년(명종 12)부터 1234년(고종 21)까지 사용되었다. 또한 몽골은 1215년(고종 2)부터 이 역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몽골을 이은 원에서는 『수시력(授時曆)』이 시행되기 전인 1280년까지 사용되었다.
중수대명력 (重修大明曆)
중수대명력은 1171년(명종 1) 금나라의 조지미가 양급의 『대명력(大明曆)』을 중수하여 편찬한 역법이다. 요나라 가준의 『대명력』과 북송의 『기원력(紀元曆)』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금에서는 1182년(명종 12)부터 1234년(고종 21)까지 사용되었다. 또한 몽골은 1215년(고종 2)부터 이 역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몽골을 이은 원에서는 『수시력(授時曆)』이 시행되기 전인 1280년까지 사용되었다.
박연혼천도는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계열의 천문도이다. 채색본의 대형 천문도로서 3원(垣) 28수(宿)의 별과 별자리 이름이 정교하게 필사되어 있다. 소장 목록에는 “朴堧渾天圖”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천문도 안에는 제작자나 천문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박연혼천도 (朴堧渾天圖)
박연혼천도는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계열의 천문도이다. 채색본의 대형 천문도로서 3원(垣) 28수(宿)의 별과 별자리 이름이 정교하게 필사되어 있다. 소장 목록에는 “朴堧渾天圖”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천문도 안에는 제작자나 천문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명시력(明時曆)은 1898년(광무 2)부터 1908년(융희 2)까지 간행된 대한제국의 역서이다. 고종 34년인 1897년(광무 1)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역서의 이름도 종래의 『시헌력(時憲曆)』에서 『명시력』으로 바꾸었다. 『명시력』은 대한제국에서 1898년부터 1908년까지 11년간 사용된 역서이다.
명시력 (明時曆)
명시력(明時曆)은 1898년(광무 2)부터 1908년(융희 2)까지 간행된 대한제국의 역서이다. 고종 34년인 1897년(광무 1)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역서의 이름도 종래의 『시헌력(時憲曆)』에서 『명시력』으로 바꾸었다. 『명시력』은 대한제국에서 1898년부터 1908년까지 11년간 사용된 역서이다.
세실소장법은 1태양년의 길이인 세실(歲實)을 과거로 소급할 때는 늘리고, 미래는 줄이는 계산 방법이다. 세실이 세월에 따라 점점 짧아짐에 따라, 역(曆) 계산의 기점인 역원(曆元)으로부터 과거는 세실의 길이를 늘이고 미래는 줄이는 계산 방법, 즉 세실의 소장(消長)을 역계산에 고려하는 방법을 말한다.
세실소장법 (歲實消長法)
세실소장법은 1태양년의 길이인 세실(歲實)을 과거로 소급할 때는 늘리고, 미래는 줄이는 계산 방법이다. 세실이 세월에 따라 점점 짧아짐에 따라, 역(曆) 계산의 기점인 역원(曆元)으로부터 과거는 세실의 길이를 늘이고 미래는 줄이는 계산 방법, 즉 세실의 소장(消長)을 역계산에 고려하는 방법을 말한다.
적년일월법은 적년(積年), 일법(日法), 연기상원(演記上元) 등을 정하여 역산(曆算)하는 방법이다. 태초력(太初曆)과 삼통력(三統曆) 등 한(漢)나라의 역법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에 와서 폐지되었다.
적년일월법 (積年日月法)
적년일월법은 적년(積年), 일법(日法), 연기상원(演記上元) 등을 정하여 역산(曆算)하는 방법이다. 태초력(太初曆)과 삼통력(三統曆) 등 한(漢)나라의 역법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에 와서 폐지되었다.
김백일은 해방 이후 여순항쟁, 옹진반도전투에 참전한 군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명은 ‘김찬규’로 해방 후 ‘김백일’로 개명했다. 1917년에 태어나 1951년 사망했다. 1938년 간도특설대를 창설하여 일제 패망 때까지 복무했다. 1945년 최남근, 백선엽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1946년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되어, 여순 항쟁, 옹진전투에 참여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1군단장으로서 10월 1일 맨 먼저 38선을 돌파했다. 이 날을 기려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1951년 3월 사망 후, 1966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백일 (金白一)
김백일은 해방 이후 여순항쟁, 옹진반도전투에 참전한 군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명은 ‘김찬규’로 해방 후 ‘김백일’로 개명했다. 1917년에 태어나 1951년 사망했다. 1938년 간도특설대를 창설하여 일제 패망 때까지 복무했다. 1945년 최남근, 백선엽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1946년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되어, 여순 항쟁, 옹진전투에 참여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1군단장으로서 10월 1일 맨 먼저 38선을 돌파했다. 이 날을 기려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1951년 3월 사망 후, 1966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 「압록강」·「사랑하는 대륙이여」 등을 저술한 시인. 비평가·친일반민족행위자.
김용제 (金龍濟)
일제강점기 「압록강」·「사랑하는 대륙이여」 등을 저술한 시인. 비평가·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제국기 황성신문 총무원, 대한자강회 총무,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서화가.
나수연 (羅壽淵)
대한제국기 황성신문 총무원, 대한자강회 총무,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서화가.
일제강점기 적극신앙단사건과 관련된 목사.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연서 (朴淵瑞)
일제강점기 적극신앙단사건과 관련된 목사. 친일반민족행위자.
방의석은 일제강점기 공흥주식회사 사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기업인·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5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함흥 일대의 운송권을 독점해 ‘조선의 자동차왕’이라고 불렸다. 1930년 함경남도 도평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194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9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연속해서 재임하였다.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이사 겸 대 주주, 함남여객자동차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방의석 (方義錫)
방의석은 일제강점기 공흥주식회사 사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기업인·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5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함흥 일대의 운송권을 독점해 ‘조선의 자동차왕’이라고 불렸다. 1930년 함경남도 도평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194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9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연속해서 재임하였다.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이사 겸 대 주주, 함남여객자동차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일제강점기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 사장, 일본무연탄제철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백낙승 (白樂承)
일제강점기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 사장, 일본무연탄제철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백낙준은 해방 이후 연세대학교 총장 ·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한 교육자 · 정치인 ·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6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1927년 예일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훗날 연희대학교 초대총장(1946년)에 취임하였다. 1942년 일제침략정책에 부응한 편집과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4후퇴 후 전시교육체제를 정비하고 교육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1960년 참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백낙준 (白樂濬)
백낙준은 해방 이후 연세대학교 총장 ·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한 교육자 · 정치인 ·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6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1927년 예일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훗날 연희대학교 초대총장(1946년)에 취임하였다. 1942년 일제침략정책에 부응한 편집과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4후퇴 후 전시교육체제를 정비하고 교육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1960년 참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해방 이후 중앙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한 평론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철 (白鐵)
해방 이후 중앙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한 평론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송무현은 해방 이후 「황혼」·「그가 사랑하는 노래」·「불사조」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다. 1903년 서울 출생이며, 송영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의 구성원으로 극단 ‘염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개벽』에 소설 「늘어가는 무리」로 공식 등단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담하여 카프의 대표적인 극작가·소설가로 활동하였다. 송영의 초기 소설과 희곡은 식민지 생산직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1959년 문인 최초로 인민상을 받았다.
송무현 (宋武鉉)
송무현은 해방 이후 「황혼」·「그가 사랑하는 노래」·「불사조」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다. 1903년 서울 출생이며, 송영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의 구성원으로 극단 ‘염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개벽』에 소설 「늘어가는 무리」로 공식 등단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담하여 카프의 대표적인 극작가·소설가로 활동하였다. 송영의 초기 소설과 희곡은 식민지 생산직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1959년 문인 최초로 인민상을 받았다.
안석영은 일제강점기 「노래하는 시절」·「바다여 말하라」·「춘풍」 등을 저술한 작가로 영화감독·배우·미술가이다. 1922년 11월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 삽화를 그렸다. 1923년에는 경향파 문학모임인 파스큘라에 참가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931년 7월 조선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원이 되어 대본을 집필하였다. 1937년 영화 「심청」으로 감독으로 데뷔하고, 영화지 『영화보』 창간에 참여했다. 1942년 일제가 만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출과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다수의 평론에서 영화인의 전쟁협력과 전쟁 참여를 역설했다.
안석영 (安夕影)
안석영은 일제강점기 「노래하는 시절」·「바다여 말하라」·「춘풍」 등을 저술한 작가로 영화감독·배우·미술가이다. 1922년 11월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 삽화를 그렸다. 1923년에는 경향파 문학모임인 파스큘라에 참가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931년 7월 조선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원이 되어 대본을 집필하였다. 1937년 영화 「심청」으로 감독으로 데뷔하고, 영화지 『영화보』 창간에 참여했다. 1942년 일제가 만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출과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다수의 평론에서 영화인의 전쟁협력과 전쟁 참여를 역설했다.
양주삼은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총리사,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이자, 감리교목사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9년(고종 16) 1월 25일에 출생하였으며,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호는 백사당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리하라 쥬산[梁原柱三]이다. 1905년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6년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도록 하고, 본인은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신사에 참배하였다. 징병제를 찬성하고,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양주삼 (梁柱三)
양주삼은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총리사,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이자, 감리교목사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9년(고종 16) 1월 25일에 출생하였으며,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호는 백사당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리하라 쥬산[梁原柱三]이다. 1905년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6년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도록 하고, 본인은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신사에 참배하였다. 징병제를 찬성하고,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토막」·「빈민가」·「소」 등의 작품을 낸 작가. 극작가·연출가.
유치진 (柳致眞)
일제강점기 「토막」·「빈민가」·「소」 등의 작품을 낸 작가. 극작가·연출가.
최영년은 일제강점기 국민신보 사장, 조선문의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9년 출생하여 1935년 사망했다. 1904년 일진회 가입 후 의병운동을 매도하고 일본과 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의 각종 선언서와 서류 작성에 관여하였다. 1909년 『국민신보』 사장이 되어 「합방상주문」과 「합방건의서」를 작성했다. 1912년 친일단체 이문회를 계승한 『조선문예』의 발행 및 편집을 맡았다. 1920년 친일단체 대동사문회 편찬부 주임 등을 역임하였고 기관지인 『대동사문회보』 발행하였다. 설화집 『실사총담』과 악부시집 『해동죽지』를 남겼다.
최영년 (崔永年)
최영년은 일제강점기 국민신보 사장, 조선문의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9년 출생하여 1935년 사망했다. 1904년 일진회 가입 후 의병운동을 매도하고 일본과 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의 각종 선언서와 서류 작성에 관여하였다. 1909년 『국민신보』 사장이 되어 「합방상주문」과 「합방건의서」를 작성했다. 1912년 친일단체 이문회를 계승한 『조선문예』의 발행 및 편집을 맡았다. 1920년 친일단체 대동사문회 편찬부 주임 등을 역임하였고 기관지인 『대동사문회보』 발행하였다. 설화집 『실사총담』과 악부시집 『해동죽지』를 남겼다.
현제명은 해방 이후 경성음악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성악가, 작곡가, 교육자로·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교회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1927년 미국 건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연주 및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했다. 1933년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며 관현악단·취주악단·합창단·중창단 등을 조직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을 전후,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했다.
현제명 (玄濟明)
현제명은 해방 이후 경성음악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성악가, 작곡가, 교육자로·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교회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1927년 미국 건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연주 및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했다. 1933년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며 관현악단·취주악단·합창단·중창단 등을 조직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을 전후,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