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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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재판소는 1895년에 부산·원산·인천 등의 개항장에 설치된 재판소이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됨에 따라 감영·유수영 및 기타 지방 관아에서 행하던 재판 사무를 각 해당 재판소에서 수리, 심판하게 되었다. 개항장 재판소의 관할 업무는 민사·형사 사건을 모두 취급하였는데, 특히 외국인과 관련된 민사사건도 처리하였다. 이후 1900년 창원·성진·옥구·평양, 1904년 용천·의주 등 13개의 개항장·개시장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근대적 재판소 조직을 갖춘 개항장재판소는 1905년 일제의 침략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할 때까지 유지·존속되었다.
개항장재판소 (開港場裁判所)
개항장 재판소는 1895년에 부산·원산·인천 등의 개항장에 설치된 재판소이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됨에 따라 감영·유수영 및 기타 지방 관아에서 행하던 재판 사무를 각 해당 재판소에서 수리, 심판하게 되었다. 개항장 재판소의 관할 업무는 민사·형사 사건을 모두 취급하였는데, 특히 외국인과 관련된 민사사건도 처리하였다. 이후 1900년 창원·성진·옥구·평양, 1904년 용천·의주 등 13개의 개항장·개시장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근대적 재판소 조직을 갖춘 개항장재판소는 1905년 일제의 침략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할 때까지 유지·존속되었다.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개시장(開市場)의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
감리서 (監理署)
조선 말기 개항장(開港場)·개시장(開市場)의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
1939년 화재 방지를 위해 조직되었던 조직체.
경방단 (警防團)
1939년 화재 방지를 위해 조직되었던 조직체.
190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운동단체.
대한자강회 (大韓自强會)
190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운동단체.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에 서울에서 조직되어 1910년 9월 국권피탈 직후까지 활동한 정치단체이다.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된 후, 이토 히로부미의 허락을 얻어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 등을 추가하여 조직하였다. 사무소는 서울 탑동에 있었고, 회원은 약 5,000명이었으며, 전국에 37개 지회가 있었다. 1908년에 기사 스케고로[志賀祐五?]가 고문으로 선출되면서 협회의 성격이 크게 변하였다. 특히 대한협회의 지도부는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대한협회 (大韓協會)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에 서울에서 조직되어 1910년 9월 국권피탈 직후까지 활동한 정치단체이다.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된 후, 이토 히로부미의 허락을 얻어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 등을 추가하여 조직하였다. 사무소는 서울 탑동에 있었고, 회원은 약 5,000명이었으며, 전국에 37개 지회가 있었다. 1908년에 기사 스케고로[志賀祐五?]가 고문으로 선출되면서 협회의 성격이 크게 변하였다. 특히 대한협회의 지도부는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1443년(세종 25) 대마도주(對馬島主)와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관해 맺은 조약.
계해약조 (癸亥約條)
1443년(세종 25) 대마도주(對馬島主)와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관해 맺은 조약.
기유약조는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통교를 위해 대마도주와 맺은 강화조약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막부를 세우고 여러차례 대마도주를 조선에 보내어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계속된 요청에 조선은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왜란 중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을 압송해올 것, 피로인을 송환할 것 등 3대 조건을 내걸었다. 일본이 이를 이행하자 일본에 통교를 허용하는 형식으로 조약이 성립되었다.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는 등 13조로 된 조약 내용은 이전 조약보다 일본에 제한을 가한 것이었다.
기유약조 (己酉約條)
기유약조는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통교를 위해 대마도주와 맺은 강화조약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막부를 세우고 여러차례 대마도주를 조선에 보내어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계속된 요청에 조선은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왜란 중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을 압송해올 것, 피로인을 송환할 것 등 3대 조건을 내걸었다. 일본이 이를 이행하자 일본에 통교를 허용하는 형식으로 조약이 성립되었다.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는 등 13조로 된 조약 내용은 이전 조약보다 일본에 제한을 가한 것이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삼포왜란 (三浦倭亂)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일제강점기 3, 1만세운동의 주역인 천도교인. 천도교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
손병희 (孫秉熙)
일제강점기 3, 1만세운동의 주역인 천도교인. 천도교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임신약조 (壬申約條)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
을묘왜변 (乙卯倭變)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
이종무는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1360년(공민왕 9)에 태어나 1425년(세종 7)에 사망했다.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에 올랐다. 세종 즉위년에 왕명을 받아 전함 227척, 군졸 1만 7285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불충한 자들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었고, 사은사로 명에 다녀오면서 동행한 정희원의 불경한 행동을 아뢰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천에 유배되었다가 복관되었다.
이종무 (李從茂)
이종무는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1360년(공민왕 9)에 태어나 1425년(세종 7)에 사망했다.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에 올랐다. 세종 즉위년에 왕명을 받아 전함 227척, 군졸 1만 7285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불충한 자들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었고, 사은사로 명에 다녀오면서 동행한 정희원의 불경한 행동을 아뢰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천에 유배되었다가 복관되었다.
조선청년연합회는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청년운동단체의 연합기관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각지에서 설립된 청년회를 항일민족운동의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결성식을 거행하고 84개 단체의 대표 124명이 참석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청년에 대한 계몽적 입장에서 『아성(我聲)』을 발행하여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들의 글을 게재하였다. 김윤식의 사회장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모스크바 선전자금 수수로 야기된 사기공산단 사건으로 서울청년회가 탈퇴하였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어 해산하였다.
조선청년연합회 (朝鮮靑年聯合會)
조선청년연합회는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청년운동단체의 연합기관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각지에서 설립된 청년회를 항일민족운동의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결성식을 거행하고 84개 단체의 대표 124명이 참석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청년에 대한 계몽적 입장에서 『아성(我聲)』을 발행하여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들의 글을 게재하였다. 김윤식의 사회장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모스크바 선전자금 수수로 야기된 사기공산단 사건으로 서울청년회가 탈퇴하였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어 해산하였다.
1547년(명종 2) 조선이 3년 전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이후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정미약조 (丁未約條)
1547년(명종 2) 조선이 3년 전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이후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