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주익종"
검색결과 총 15건
국민저축조합은 내자 동원 위주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저축을 늘리기 위해 1962년부터 지역별과 직장별로, 또 학교마다 조직된 저축조합이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을 위해 투자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지역별, 직장별, 학교마다 국민저축조합을 만들어 저축을 독려하였다. 저축 여력이 없고 인플레이션으로 저축 유인도 없어서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1965년 금리현실화(대폭 인상)에 따라 은행 예금이 급증하자 국민저축조합은 그 시효를 상실하였다.
국민저축조합 (國民貯蓄組合)
국민저축조합은 내자 동원 위주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저축을 늘리기 위해 1962년부터 지역별과 직장별로, 또 학교마다 조직된 저축조합이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을 위해 투자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지역별, 직장별, 학교마다 국민저축조합을 만들어 저축을 독려하였다. 저축 여력이 없고 인플레이션으로 저축 유인도 없어서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1965년 금리현실화(대폭 인상)에 따라 은행 예금이 급증하자 국민저축조합은 그 시효를 상실하였다.
김용환은 박정희 경제개발기에 재무부와 농림부, 대통령비서실의 관료로서 경제개발에 투자 재원을 마련하며 경제 위기를 수습한 인물이다. 그는 재무부와 농림부, 대통령비서실의 관료로서 경제개발에 투자 재원을 마련하며 경제 위기를 수습하였다. 1965년 금리현실화,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1973년 중화학공업화의 자금조달계획 수립,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이 전자의 업적이며, 1972년 8·3 고리사채동결조치와 1974년 석유파동에 대한 긴급조치가 후자의 업적이다.
김용환 (金龍煥)
김용환은 박정희 경제개발기에 재무부와 농림부, 대통령비서실의 관료로서 경제개발에 투자 재원을 마련하며 경제 위기를 수습한 인물이다. 그는 재무부와 농림부, 대통령비서실의 관료로서 경제개발에 투자 재원을 마련하며 경제 위기를 수습하였다. 1965년 금리현실화,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1973년 중화학공업화의 자금조달계획 수립,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이 전자의 업적이며, 1972년 8·3 고리사채동결조치와 1974년 석유파동에 대한 긴급조치가 후자의 업적이다.
대일청구권자금은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식민지배라는 한국과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청산하는 의미로 한국이 일본에게서 받은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 자금이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게서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를 받았는데, 외자 도입이 쉽지 않았던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일청구권자금 (對日請求權資金)
대일청구권자금은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식민지배라는 한국과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청산하는 의미로 한국이 일본에게서 받은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 자금이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게서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를 받았는데, 외자 도입이 쉽지 않았던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메리야스공업은 신축성과 통기성이 좋은 편물로서 양말을 제조하는 공업으로서 일제하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대표적인 한국인 공업이다. 메리야스는 기계로 하나의 실로 짠, 신축성과 통기성이 좋은 천으로서 편물(編物)이라고 한다. 메리야스는 양말에서 기원하였으며 그 외에 내의, 스웨터, 털모자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한국의 메리야스공업은 1900년대 말 수동식 양말 직조로 시작하여 1920년대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한국인 공업으로서 발달하였다.
메리야스공업 (medias工業)
메리야스공업은 신축성과 통기성이 좋은 편물로서 양말을 제조하는 공업으로서 일제하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대표적인 한국인 공업이다. 메리야스는 기계로 하나의 실로 짠, 신축성과 통기성이 좋은 천으로서 편물(編物)이라고 한다. 메리야스는 양말에서 기원하였으며 그 외에 내의, 스웨터, 털모자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한국의 메리야스공업은 1900년대 말 수동식 양말 직조로 시작하여 1920년대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한국인 공업으로서 발달하였다.
미곡수집령은 미군정기에 쌀 공급이 줄어들고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이 1946년 2월 1일부로 시행한 쌀의 강제수매 제도이다. 해방 후 농촌의 쌀 소비가 늘고 도시 반입량이 줄어 품귀 현상을 빚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일제말의 쌀 공출제와 같은 내용의 농가 잉여미의 강제수매 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집 시기를 놓친 1946년의 실적(1945년 쌀의 수집 실적)은 좋지 않았으나 1947년과 1948년에는 수집 실적이 좋았다. 미군정은 거의 계획대로 수집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도시 식량 문제의 완화에 일조하였으나 농민의 반발을 샀다.
미곡수집령 (米穀收集令)
미곡수집령은 미군정기에 쌀 공급이 줄어들고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이 1946년 2월 1일부로 시행한 쌀의 강제수매 제도이다. 해방 후 농촌의 쌀 소비가 늘고 도시 반입량이 줄어 품귀 현상을 빚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일제말의 쌀 공출제와 같은 내용의 농가 잉여미의 강제수매 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집 시기를 놓친 1946년의 실적(1945년 쌀의 수집 실적)은 좋지 않았으나 1947년과 1948년에는 수집 실적이 좋았다. 미군정은 거의 계획대로 수집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도시 식량 문제의 완화에 일조하였으나 농민의 반발을 샀다.
새나라자동차공업(주)는 일본 닛산 블루버드 승용차의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여 새나라승용차라는 이름으로 시판한 한국 최초의 외국산 모델 승용차 회사이다. 이 회사는 1962년 일본 닛산 블루버드〔靑鳥〕 승용차 모델을 들여와 그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여 새나라승용차라는 이름으로 시판하였다. 폐차된 미군 승용차 부품을 활용해서 만든 재생자동차공업 시대를 끝내고 외국산 모델 승용차 시대를 열었으나, 외환 사정 악화 및 정치 자금 의혹으로 1년 만에 폐업하였다.
새나라자동차공업㈜ (새나라自動車工業(株))
새나라자동차공업(주)는 일본 닛산 블루버드 승용차의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여 새나라승용차라는 이름으로 시판한 한국 최초의 외국산 모델 승용차 회사이다. 이 회사는 1962년 일본 닛산 블루버드〔靑鳥〕 승용차 모델을 들여와 그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여 새나라승용차라는 이름으로 시판하였다. 폐차된 미군 승용차 부품을 활용해서 만든 재생자동차공업 시대를 끝내고 외국산 모델 승용차 시대를 열었으나, 외환 사정 악화 및 정치 자금 의혹으로 1년 만에 폐업하였다.
신진자동차는 한국에서 외국산 모델 자동차 시대의 대표격인 기업으로서 일본 도요타 모델 승용차를 조립 시판하여 시장을 선도하였으나 1970년대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에 실패하여 부실화한 자동차 회사이다. 1966년부터 도요타의 코로나승용차 부품을 수입 조립하여 승용차 시장을 장악했으나, 그에 안주하여 1970년대 정부의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 정책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부실화하였다가 대우그룹에 인수되어 대우자동차㈜로 새출발하였다.
신진자동차 (新進自動車)
신진자동차는 한국에서 외국산 모델 자동차 시대의 대표격인 기업으로서 일본 도요타 모델 승용차를 조립 시판하여 시장을 선도하였으나 1970년대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에 실패하여 부실화한 자동차 회사이다. 1966년부터 도요타의 코로나승용차 부품을 수입 조립하여 승용차 시장을 장악했으나, 그에 안주하여 1970년대 정부의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 정책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부실화하였다가 대우그룹에 인수되어 대우자동차㈜로 새출발하였다.
오원철은 박정희 시대(1961~1979년)에 상공부 관료와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 역할을 한 기술 관료(테크노크라트)이다. 오원철은 일제하 황해도에서 태어나 해방 후 화학공학 교육을 받고 공군 기술 장교로 복무한 후 박정희 집권기에 상공부 관료와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서 석유화학공업과 자동차공업, 조선공업 등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건설 업무를 맡았다. 특히 대통령 지근 거리에서 근무한 8년간 그는 중화학공업화에 관한 한 박정희의 분신이었다.
오원철 (吳源哲)
오원철은 박정희 시대(1961~1979년)에 상공부 관료와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 역할을 한 기술 관료(테크노크라트)이다. 오원철은 일제하 황해도에서 태어나 해방 후 화학공학 교육을 받고 공군 기술 장교로 복무한 후 박정희 집권기에 상공부 관료와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서 석유화학공업과 자동차공업, 조선공업 등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건설 업무를 맡았다. 특히 대통령 지근 거리에서 근무한 8년간 그는 중화학공업화에 관한 한 박정희의 분신이었다.
이중곡가제는 심각한 도농간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1968년부터 추곡 매입가를 매년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인상하고 도시 소비자에 대한 쌀 판매가는 매입가 이하로 한 제도이다. 물가 안정을 위해 외국의 값싼 식량을 계속 도입한 결과 1960년대 중엽까지 도농간 소득 격차가 확대되자, 박정희 정부는 1968년부터 추곡 매입가를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인상하고 도시 소비자에게는 정부 수매가 이하로 판매하는 이중곡가제를 실시하였다. 그 덕분에 1970년대 중엽에는 농가 소득이 도시 가구 소득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이중곡가제 (二重穀價制)
이중곡가제는 심각한 도농간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1968년부터 추곡 매입가를 매년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인상하고 도시 소비자에 대한 쌀 판매가는 매입가 이하로 한 제도이다. 물가 안정을 위해 외국의 값싼 식량을 계속 도입한 결과 1960년대 중엽까지 도농간 소득 격차가 확대되자, 박정희 정부는 1968년부터 추곡 매입가를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인상하고 도시 소비자에게는 정부 수매가 이하로 판매하는 이중곡가제를 실시하였다. 그 덕분에 1970년대 중엽에는 농가 소득이 도시 가구 소득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중동 건설붐은 1973년의 석유파동(石油波動) 이후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 국가들의 오일 달러를 벌기 위해 그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건이다.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 이후,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이 풍부한 오일 달러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나섰는데 한국 건설업체들이 그 국가들의 도로, 항만, 주택, 플랜트 건설 시장에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인력 및 기술 개발과 국제 경영 노하우 획득, 국가 브랜드 상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중동 건설붐 (中東 建設boom)
중동 건설붐은 1973년의 석유파동(石油波動) 이후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 국가들의 오일 달러를 벌기 위해 그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건이다.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 이후,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이 풍부한 오일 달러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나섰는데 한국 건설업체들이 그 국가들의 도로, 항만, 주택, 플랜트 건설 시장에 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공사를 수주하고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인력 및 기술 개발과 국제 경영 노하우 획득, 국가 브랜드 상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은 박정희 정부가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 선언에 따라 6월에 발표한 계획으로, 철강, 조선, 기계, 화학, 비철금속, 전자 등 6개 부문을 전략 업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이다. 이 계획은 중화학공업화추진위원회와 기획단이 5월에 조직된 후 6월에 발표한 것으로, 1973년부터 1981년까지 8년간 총 88억 달러를 투자하여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중화학공업육성계획 (重化學工業育成計劃)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은 박정희 정부가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 선언에 따라 6월에 발표한 계획으로, 철강, 조선, 기계, 화학, 비철금속, 전자 등 6개 부문을 전략 업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이다. 이 계획은 중화학공업화추진위원회와 기획단이 5월에 조직된 후 6월에 발표한 것으로, 1973년부터 1981년까지 8년간 총 88억 달러를 투자하여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상회사는 개항기, 특히 대한제국기에 설립되어 정부의 허가를 얻어 특정 지역에서 특정 물건의 품종에 대한 독점 취급권을 가진 상업회사이다.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특정 지역의 특정 품종의 독점적 취급권을 얻은 상업회사로서 개항 초기인 1880년대에는 객주, 시전상인이 그 설립 주체였으나 대한제국기에는 관료도 설립 주체로 대거 참여하였다. 상회사는 실제로 상행위를 하는 군소 상인들을 수탈하는 기능을 하였다.
상회사 (商會社)
상회사는 개항기, 특히 대한제국기에 설립되어 정부의 허가를 얻어 특정 지역에서 특정 물건의 품종에 대한 독점 취급권을 가진 상업회사이다.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특정 지역의 특정 품종의 독점적 취급권을 얻은 상업회사로서 개항 초기인 1880년대에는 객주, 시전상인이 그 설립 주체였으나 대한제국기에는 관료도 설립 주체로 대거 참여하였다. 상회사는 실제로 상행위를 하는 군소 상인들을 수탈하는 기능을 하였다.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일제하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기에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한 사업이다. 일제는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기에 정신운동 차원의 농가경제갱생계획과 병행하여 그 물적 지원의 차원에서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 소작농에게 토지 구입 자금을 융자하였다. 전 농가의 1/3이 넘는 농가를 대상으로 시행된 결과, 자작농의 몰락이 저지되었다.
자작농지설정사업 (自作農地設定事業)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일제하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기에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한 사업이다. 일제는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기에 정신운동 차원의 농가경제갱생계획과 병행하여 그 물적 지원의 차원에서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 소작농에게 토지 구입 자금을 융자하였다. 전 농가의 1/3이 넘는 농가를 대상으로 시행된 결과, 자작농의 몰락이 저지되었다.
강정택은 일제하의 농정학자이자 해방 후 경성대학 교수, 농림부 차관 등을 역임한 농업정책학자이다. 강정택은 일제하에서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제1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제대 농학부의 조수, 해방후 경성대학 교수, 농림부 차관을 역임한 농업정책가이다. 대한민국 농업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었으나 불행히도 한국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다.
강정택 (姜鋌擇)
강정택은 일제하의 농정학자이자 해방 후 경성대학 교수, 농림부 차관 등을 역임한 농업정책학자이다. 강정택은 일제하에서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제1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제대 농학부의 조수, 해방후 경성대학 교수, 농림부 차관을 역임한 농업정책가이다. 대한민국 농업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었으나 불행히도 한국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다.
고무신 제조업은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신발로 널리 보급된 고무신을 제조하는 공업으로서 경성, 평양, 부산에 발달하였으며 한국인 비중이 컸던 산업이다. 수입 제품으로 국내 시장이 형성되자 국내 생산이 개시되어 수입품을 몰아냈으며, 부산에서는 일본인 업주의 비중이 컸으나 경성과 평양에서는 한국인 업주의 비중이 더 컸다. 전시통제기에도 최소한의 업체 존속은 보장되었고, 고무공업자들은 경영의 안정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고이윤까지 얻었다. 일제말에는 통고무신 외에 바닥만 고무인 면포화도 생산되었다.
고무신 제조업 (고무신 製造業)
고무신 제조업은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신발로 널리 보급된 고무신을 제조하는 공업으로서 경성, 평양, 부산에 발달하였으며 한국인 비중이 컸던 산업이다. 수입 제품으로 국내 시장이 형성되자 국내 생산이 개시되어 수입품을 몰아냈으며, 부산에서는 일본인 업주의 비중이 컸으나 경성과 평양에서는 한국인 업주의 비중이 더 컸다. 전시통제기에도 최소한의 업체 존속은 보장되었고, 고무공업자들은 경영의 안정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고이윤까지 얻었다. 일제말에는 통고무신 외에 바닥만 고무인 면포화도 생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