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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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고광수 (高光洙)
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오설 (權五卨)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태석은 일제강점기 조선민흥회와 신간회,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8·15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조선민족대동단사건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조선민흥회 상무위원, 1927년 신간회 창립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8·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신한민족당에 참여하였다.
권태석 (權泰錫)
권태석은 일제강점기 조선민흥회와 신간회,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8·15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조선민족대동단사건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조선민흥회 상무위원, 1927년 신간회 창립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8·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신한민족당에 참여하였다.
김명식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0~1930년대 사회운동, 한국사, 문예운동 등에 관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8~1936년 일본 오사카에 체류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였다. 중일전쟁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기대를 걸고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김명식 (金明植)
김명식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20~1930년대 사회운동, 한국사, 문예운동 등에 관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28~1936년 일본 오사카에 체류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하였다. 중일전쟁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기대를 걸고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김사국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과정에서 국민대회 준비를 주도하다 투옥되었다. 조선노동대회,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에 힘썼다. 서울청년회 내에서 상해파 국내부와 동아일보계를 축출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를 낳았다. 서울파 공산주의그룹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여 이끌었다. 만주에 동양학원, 대동학원을 세워 교육운동을 벌였다. 통일 조선공산당 결성을 위해 노력했으나 화요파에 의해 배제되었다.
김사국 (金思國)
김사국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과정에서 국민대회 준비를 주도하다 투옥되었다. 조선노동대회,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에 힘썼다. 서울청년회 내에서 상해파 국내부와 동아일보계를 축출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를 낳았다. 서울파 공산주의그룹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여 이끌었다. 만주에 동양학원, 대동학원을 세워 교육운동을 벌였다. 통일 조선공산당 결성을 위해 노력했으나 화요파에 의해 배제되었다.
김재봉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3·1운동 후 서울에서 『만선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상길과 만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재봉 (金在鳳)
김재봉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3·1운동 후 서울에서 『만선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상길과 만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종범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농총동맹과 북풍회, 만주 정통단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부산 출신으로, 재일 사상단체인 코스모구락부 회장을 지냈고, 1923년 1월 북성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1월 부산노동동맹회 집행위원, 3월 남선노농동맹 창립대회 임시의장,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비밀결사 고려총국 국내부와 까엔당에 하였고, 사상단체 건설사 북풍회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 지린〔吉林〕에서 무장단체 정통단(正統團)을 결성하여 단장이 되었다.
김종범 (金鍾範)
김종범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농총동맹과 북풍회, 만주 정통단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부산 출신으로, 재일 사상단체인 코스모구락부 회장을 지냈고, 1923년 1월 북성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1월 부산노동동맹회 집행위원, 3월 남선노농동맹 창립대회 임시의장,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비밀결사 고려총국 국내부와 까엔당에 하였고, 사상단체 건설사 북풍회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 지린〔吉林〕에서 무장단체 정통단(正統團)을 결성하여 단장이 되었다.
김찬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립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고려총국 내지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 4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1월 화요회 상무집행위원을 지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 책임자였다.
김찬 (金燦)
김찬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립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고려총국 내지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 4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1월 화요회 상무집행위원을 지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 책임자였다.
김치정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유악한국혁명동지회,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산자사, 노동계급사 결성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2년 11월 일제 경체에 체포되어 1936년 순국하였다.
김치정 (金致廷)
김치정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유악한국혁명동지회,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산자사, 노동계급사 결성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2년 11월 일제 경체에 체포되어 1936년 순국하였다.
박낙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자와 8·15광복 후 조선정판사 사장을 지낸 사회주의운동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월회 기관지인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 1926년 『대중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낙종 (朴洛鍾)
박낙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자와 8·15광복 후 조선정판사 사장을 지낸 사회주의운동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월회 기관지인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 1926년 『대중신문』의 발행인을 역임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청년총동맹,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대 중반 함경남도 지역 청년운동에서 출발하여 조선청년총동맹 간부로 활동하였다. 안광천 등과 논쟁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35년 출옥 후 식민지적 특수성에 주목해 조선의 농업 문제를 분석한 글을 발표하였다.
박문병 (朴文秉)
일제강점기 조선청년총동맹,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대 중반 함경남도 지역 청년운동에서 출발하여 조선청년총동맹 간부로 활동하였다. 안광천 등과 논쟁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35년 출옥 후 식민지적 특수성에 주목해 조선의 농업 문제를 분석한 글을 발표하였다.
박형병은 8일제강점기 고려공산동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중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고, 1923년 북성회를 조직했다. 귀국 후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4년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고,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ML파에 반대하여 1927년 12월 서상파 조선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 등을 번역하였다.
박형병 (朴衡秉)
박형병은 8일제강점기 고려공산동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중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고, 1923년 북성회를 조직했다. 귀국 후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4년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고,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ML파에 반대하여 1927년 12월 서상파 조선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 등을 번역하였다.
변희용은 일제강점기 청년운동 및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고 령출신. 게이오(慶應)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사상단체인 신인회, 효민회, 코스모구락부, 십월회, 북성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전진(前進)』의 편집 발행인이었다. 1927년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고. 1947년 잡지 [재건]의 주간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 시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25교수 데모를 주도했다.
변희용 (卞熙瑢)
변희용은 일제강점기 청년운동 및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고 령출신. 게이오(慶應)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사상단체인 신인회, 효민회, 코스모구락부, 십월회, 북성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전진(前進)』의 편집 발행인이었다. 1927년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고. 1947년 잡지 [재건]의 주간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 시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25교수 데모를 주도했다.
신일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1916년 조선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22년 잡지 『신생활』 기자로 많은 기사를 집필하였으며, 필화사건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1928년에 걸쳐 민족통일론에 대해서 ML파와 논쟁을 벌였다. 만주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신일용 (辛日鎔)
신일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1916년 조선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22년 잡지 『신생활』 기자로 많은 기사를 집필하였으며, 필화사건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1928년에 걸쳐 민족통일론에 대해서 ML파와 논쟁을 벌였다. 만주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농화학연구를 위한 학술단체.
한국응용생명화학회 (韓國應用生命化學會)
농화학연구를 위한 학술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