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8월 함경남도 덕원의 당우(堂隅)청년회 집행위원(학예부 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원산에서 열린 함남청년연맹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덕원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1927년 8월 서면으로 열린 조선청년총동맹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27년 12월에 열린 함남기자대회에 『 중외일보』 덕원지국 소속으로 참가하였다가 검거되었으나 이듬해 4월 무죄 방면되었다.
박문병(朴文秉)은 변증법적 유물론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7년 10월과 11월에 『 조선지광』에 발표한 「속학적 유물사관의 극복」을 통해 안광천과 박형병을 ‘속학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비판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계급의식을 전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8년 1월에는 『조선지광』에 발표한 「절충주의 비판」을 통해 ‘정우회선언’을 “절충주의적, 현상 추수주의적 발전론, 비빔밥식 민족단일당론”이라고 비판하였다.
1928년 3월에 조선공산당 함경남도당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선전부 담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8년 5월 고려공산청년회 제3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8월 중에 개최하기로 결정한 고려공산청년회 전국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지린〔吉林〕에서 중앙위원회 재결성에 참여하고 선전부 책임 겸 일본부 조직책임을 맡았다.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을 재결성하고 선전부장이 되었다. 1929년 5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1년 11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고, 1932년 10월에 형이 확정되었다.
1935년 7월 출옥 후 마르크스주의 농업론에 입각해 조선의 농업 문제를 해명하는 일련의 글을 발표하였다. 1936년 6월부터 8월까지 39회에 걸쳐 『 조선중앙일보』에 「농업 조선의 검토: 현 단계의 조선 농업의 경제적 제 관계의 해부」를 연재하였고, 1936년 10월에는 『비판(批判)』에 「조선 농업의 구조적 특질: 조선 농촌의 성격 규정에 대한 기본적 고찰」을 발표하였다. 조선 농업의 반봉건성을 강조하는 인정식을 비판하고, 봉건적 영세농적 생산 방법과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과 ‘혼성’되어 있다고 분석하였다. 사적 유물론의 도식을 넘어 식민지적 특성에 주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