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7.2m.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으로, 미륵전 오른쪽의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이곳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보물, 1997년 지정)으로, 맨 위에는 종(鐘) 모양의 사리장엄구가 있고, 그 남쪽에 석탑이 서 있다. 이처럼 계단 앞에 석탑을 세운 것은 사리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석탑은 처음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추정된다.
받침돌은 2층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래층 받침돌은 10여 장의 길고 큰 돌로 조립된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다. 여러 장의 돌로 짜여진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다. 덮개돌도 여러 장의 널돌로 결구(結構)되었는데, 윗면의 굄대는 둥글고 네모난 모양으로 새기지 않고, 여러 장의 널돌로 1단의 높다란 굄을 만들어 끼워 특이하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 역시 여러 장의 널돌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 가운데 기둥 양쪽의 면석을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여 주목된다. 여러 장의 널돌로 짜여진 덮개돌은 밑면이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두지 않아 윗면처럼 평평하다.
탑신부(塔身部)는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다만 2층 이상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던 데에 반해, 1층 몸돌은 여러 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1층의 지붕돌 역시 2장의 돌로 구성되어, 받침돌의 구성 수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곧 1층 몸돌은 좌우에 제법 넓은 모서리 기둥을 조각한 돌을 세우고서, 그 사이에 면석을 끼워 조립하였다. 2층 이상의 몸돌은 체감률이 완만한 편으로, 1층 몸돌처럼 모서리 기둥이 제법 넓다. 지붕돌은 밑면에 낙수홈이 없고, 추녀 밑은 가운데 부분에서 좌우의 귀퉁이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반곡(反曲)되어 넓은 편인데, 안쪽에 낮고 좁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윗면은 윗부분의 경사가 급하지만 중간 이후에는 완만해졌고, 네 귀퉁이의 합각(合角)도 전각(轉角)에 이르면서 경사를 줄였다. 각 층의 지붕돌 윗면에는 1단의 각진 굄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석탑의 조성 시기가 다소 늦었음을 알려준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부터 보주(寶珠)까지 온전한 편이다. 다만, 상륜부의 크기가 커서 6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잘못 이해되기 쉬울 정도이다. 노반은 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과 약간 다른데, 몸체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이 덮개돌처럼 튀어나왔으나 밑면에는 받침이 없다. 노반 위에는 이형(異形)의 복발(覆鉢)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는 연꽃이 위로 솟은 모습의 앙련(仰蓮)을 새긴 앙화(仰花)가 놓여져 있으며, 그 위에 다시 보륜(寶輪)을 얹고서 맨 꼭대기에는 보주를 꽂았다. 이처럼 상륜부의 모습이 이전의 전통적인 양식과 다른 것은 후대에 이르러 외래의 영향을 받아 조성한 탓이라고 추정된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세부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곧 아래층 받침돌이 좁고, 위아래 받침돌의 덮개돌 위에 별도의 돌을 끼웠으며, 지붕돌 추녀 밑에 반곡을 두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이한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는 조형 양식이나 각 부재의 돌다듬기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석탑 뒤쪽에 놓여 있는 봉로대(奉爐臺)는 석탑보다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