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이상의 높은 건물로 궁전, 사원, 성루(城樓), 누대(樓臺) 등을 누각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림의 소재로는 명승지의 경관을 조망하기 위하여 세워진 정자 계통의 고루(高樓)가 주로 그려졌다.
중국에서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악양루(岳陽樓), 황학루(黃鶴樓), 등왕각(滕王閣) 등을 그린 누각산수도들이 이 분야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당나라 말기 이후 즐겨 그려졌다. 이는 악양루를 소재로 한 당나라 두보(杜甫)의 오언시(五言詩)인 「등악양루(登岳陽樓)」, 맹호연(孟浩然)의 「임동정(臨洞庭)」,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 그리고 등왕각을 소재로 한 당(唐)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또 황학루를 소재로 한 당(唐) 최호(崔顥)의 「등황학루(登黃鶴樓)」와 같은 명시문(名詩文)이 널리 읊어지면서, 이들 문학작품을 주제로 한 시의도(詩意圖)로서 누각산수도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악양루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의 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에 등장하고, 팔선(八仙) 중 하나인 여동빈(呂洞賓)을 그린 신선도(神仙圖)에서도 다루어져 소상팔경도나 신선도의 유행과 더불어 널리 그려졌다.
누각산수도는 산수 배경에 계화(界畵) 기법으로 묘사된 누각이 어우러지는 것이 상례이다. 원대(元代)에 누각을 치밀한 계화로 그려낸 하영(夏永, 14세기 중엽 활동)과 청대 원강(袁江)의 누각산수도가 유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적지 않게 그려졌으나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이수문(李秀文)이 그린 것으로 전칭되는 「악양루도」(일본 개인 소장)가 알려져 있다. 또한 안견(安堅)의 「사시팔경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양팽손(梁彭孫)의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에서도 누각산수도 형식이 참작되었고, 조선 중기에는 전 이징(李澄)의 「니금산수도」(개인소장)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천고최성첩』 임모본(臨摹本)(윤득화본(尹得和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의 「악양루도」와 「등왕각도」,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중의 「악양장관도(岳陽壯觀圖)」와 「등각고회도(滕閣高會圖)」, 「황학취적도(黃鶴吹笛圖)」, 정선(鄭敾)의 「동정악루도(洞庭岳樓圖)」(간송미술관 소장), 김득신(金得臣)의 「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개인 소장) 등 많은 누각산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는 「동관계회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보듯이 계회도(契會圖)에도 수용되었고, 「백자청화산수문각병」처럼 청화백자의 문양으로도 그려져 그 성행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누각산수도의 도상은 명(明)의 사신(使臣) 주지번(朱之蕃)이 조선에 왔을 때 주고 간 서화합벽첩(書畵合璧帖)인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의 「악양루도」와 「등왕각도」의 도상이 범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심사정의 「동정추월도」(간송미술관)와 이방운의 「해상선인도(海上仙人圖)」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산수화보(山水畵譜)인 『명산도(名山圖)』 중의 「악양도」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누각산수도는 조선 후기 이후 남종화의 유입과 더불어 예찬(倪瓚)식의 소박한 모옥(茅屋)이 즐겨 그려지면서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