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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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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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
개념
차 재배를 목적으로 조성한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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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차 재배를 목적으로 조성한 밭.
내용

차는 9세기 전반에 왕명으로 지리산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차 재배지는 지리산 하동의 화개동이다. 주로 자생하는 차를 지방민을 동원하여 공납으로 거두어들였다.

당시 차의 공납과 관련된 사정은 이규보(李奎報)의 차시(茶詩) 중에 “화개에서 차 따는 일을 말하면 관에서 독려함에 장정이나 노약자 구별 없었네. 험준한 산속에서 간신히 따 모아 멀리 서울에 등짐져 날랐네.”라고 한 구절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작설차(雀舌茶)의 생산지가 기록되어 있다. 작설차를 토공으로 바치던 이들 지역은 모두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경상도의 밀양도호부·울주군·진주목·함양군·고성현·하동현·산음현·진해현, 그리고 전라도의 고부군·옥구현·부안현·정읍현·나주목·영암군·강진현·무장현·함평현·남평현·무안현·고창현·흥덕현·순창현·구례현·광양현·장흥도호부·담양도호부·순천도호부·무진군·보성군·낙안군·고흥현·동복현·진원현·영광현·해진군 등의 35개 지방에서 차를 토산물로 바쳤다.

차가 어느 정도의 양이 생산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 자생하는 토산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양은 못 되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보다 약 70여 년 뒤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土産條)에도 차의 생산지가 기록되어 있다.

전자와 비교해 보면, 진해현·함양현·구례현·장성현·무진군·영암군 등 종래의 6개 지방이 빠지고, 양산군·곤양군·단성현·태인현·광산현·능성현·남양군 등의 7개 지방이 새로운 차 생산지로 나타나고 있다.

차나무가 자생하던 지방민들은 매년 차의 공납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15세기 후반에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金宗直)은 군민들의 차공납으로 인한 고통을 목격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원을 개발하였다.

그는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나무밭에 야생하는 차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였다. 그 곳에 다원을 개발하여 상공액(上供額)을 충당하였다.

당시의 여러 지방에서는 다공(茶貢)으로 인한 관인의 침학(침범하여 포학하게 행동함)이 심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은 관가에서 좋은 차인 창기(槍旗 ; 차나무의 싹 모양이 창 같고 잎 모양이 기 같다는 데서, 차나무의 싹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만을 취해간다고 하였다.

19세기 전반에 편찬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에 기록된 차생산지를 조선 초기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10여 곳 이상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다공이 조선 초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음은 19세기 중엽 지리산의 승려들이 관인들을 두려워하여 차를 깊이 감춘다고 한 사실과 19세기 후반의 범해(梵海)가 “보림사(寶林寺)의 작설은 감영에 실어가고 화개동의 좋은 차는 대궐에 바친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 차의 재배에 대하여는 노력하지 않은 채 토공만을 강요한 관인의 주구는 오히려 차의 생산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는 선조에게 차산업을 일으켜 무역할 것을 건의하였다. 1881년(고종 18)경에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유낭림(劉蓈林) 등이 영선사(領選士) 김윤식(金允植)에게 다업(茶業)의 진흥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1883년부터는 농상사(農商司)에서 차의 재배를 관장하여 차의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하였다. 1885년에는 청나라로부터 차나무 모종 6,000주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에 의하여 차산업이 장려되었다.

1912년경에 무등다원(無等茶園)이, 1940년 보성다원(寶城茶園)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경영되기도 하였다. 현재 무등산의 삼애다원(三愛茶園), 보성의 보성다원, 제주도의 한라다원 등이 있다. 다솔사(多率寺)·화엄사 등의 사찰의 소규모 다원도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신증동국여지승람』
『점필재집(佔畢齋集)』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생활다예』(김상현·김봉호, 태평양박물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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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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