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는 죽은 사람의 내세를 위하여 무덤에 함께 묻던 그릇, 인형, 생활 용구 등의 기물이다. 순장의 폐해를 없애고 죽은 이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등장했다. 명기는 넓은 의미로 무덤에 부장되는 모든 부장품을 뜻한다. 협의로는 조선 시대에 부장된 10㎝ 이하 소형 규격의 기물을 의미한다. 소형 명기는 16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부장되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 명기 관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기는 자기·도기·와기 등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어 당시 공예품 연구에 도움을 준다. 또한 조선 시대의 상장례 풍습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명기는 순장 풍습의 폐해를 없애고자 추령(芻靈)과 같은 인형이나 소형 그릇을 목기(木器) · 칠기(漆器) · 와기(瓦器) · 도기(陶器) · 자기(磁器) 등으로 제작하여 무덤에 부장한 것을 이른다. 넓은 의미로는 삼국시대의 대형 분묘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처럼 일상용기와 같은 크기로 제작된 부장품도 포함할 수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평균 10㎝ 이하의 소형 규격으로 정형화된 기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광의의 의미에서는 무덤에 부장되는 모든 부장품(副葬品)을 뜻하며, 협의의 의미에서는 조선시대의 무덤에 부장된 10㎝ 이하로 특별히 제작된 소형 그릇을 말한다.
명기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 찾을 수 있다. 단궁 상(上)에는 “명기는 귀신의 그릇이요, 제기는 사람의 그릇이다(夫明器鬼器也 祭器人器也).”라는 내용이 있고, 단궁 하(下)에는 “공자는 죽은 자에게 살아 있는 자의 그릇을 쓰게 한다는 것은 순장과 같고, 명기는 신명의 것으로 도거(塗車)와 추령은 옛날부터 있던 명기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는 추령을 만드는 자는 선하며, 용(俑)을 만드는 자는 어질지 않다(孔子謂 … 死者而用生者之器也 不殆於用殉乎哉 其曰明器 神明之也 塗車芻靈 自古有之 明器之道也 孔子謂爲芻靈者善 謂爲用者不仁 不殆於用人乎哉).”고 하였다. 즉 죽은 이를 위한 그릇이 명기이며, 순장 풍습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없애고자 정교하게 만든 용의 사용마저 부정하며 도거나 추령 정도의 사용을 언급한 것이다.
신라시대인 503년(지증왕 3)에 순장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경상북도 경주 황성동 · 용강동 석실분에서 토용(土俑) 및 명기가 부장된 것을 통해 순장 풍습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의 명기 관련 기록은 1418년(세종 1)을 시작으로 1823년(순조 23)까지 총 71건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그 중 『세종실록』 「오례」 흉례의식 천전의(遷奠儀)에는 “명기는 신명의 것이다. 모양은 평시와 같이 만드는데, 다만 추악하고 작을 뿐이다(明器 神明之也 象似平時而作 但麤惡而小耳).”라고 정의하고, 그 뒤에 종류와 수량에 대해 기록해 두었다.
위 기록들로 보면, 명기는 순장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등장하였으며, 죽은 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하여 무덤에 부장한 소형 그릇이자, 그 혼을 위로하기 위한 의례기였던 것이다.
넓은 의미의 명기 제작이 순장 풍습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은 고대의 기록뿐 아니라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다양한 분묘에서 고배(高杯), 발형(鉢形) 기대(器臺)를 비롯한 마구(馬具), 철제 무기류 등과 함께 순장의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순장 풍습이 사라지고 순장자를 대신하여 소형 인물상과 동물상, 여러 가지 토기와 철제품이 부장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경기도 용인 마북리 유적 5호 · 7호 · 9호 석곽묘에서 입지름 10㎝ 내외의 도기가 출토된 예도 있지만 소형 명기가 본격적으로 부장되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세종실록』 「오례」 흉례 서례(序例) 명기 조에는 명기의 이름과 재질이 기록되어 있다. 자기로 제작된 것은 영(嬰) · 주준(酒尊) · 주병(酒甁) · 잔탁(盞托) · 향로 · 반발(飯鉢) · 시접(匙楪) · 갱접(羹楪) · 찬접(饌楪) · 적접(炙楪) · 소채포해접(蔬菜脯醢楪) 등이 있고, 주준은 도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죽기(竹器)는 소(筲)가 있으며, 목기로는 숟가락[匙] · 젓가락[筯] · 관반(盥盤) · 관이(盥匜)가 있다. 검은색 옻칠을 한 칠기는 향합, 장(杖), 식안(食案), 식탁(食杔), 타우(唾盂), 혼병(溷甁), 수기(溲器) 등이 있으며, 와기(瓦器)로는 와정(瓦鼎) · 와증(瓦甑) · 와조(瓦竈) · 와무(瓦甒)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재질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환부(丸釜) · 포작(匏勺) · 궤(几) 등도 명기로 제작되었다.
명기는 품계에 따라 차별이 두어진 사실이 『국조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편찬된 예서에서도 일관되게 품계에 따른 제한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이 성리학의 실천지침인 주자 가례의 시행에 따라 엄격한 계층별 구분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이러한 상황은 명기와 함께 부장된 지석(誌石)의 제작 양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시대의 명기는 15세기 전반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음이 『세종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사서인(士庶人) 계층의 경우 판결사(判決事) 김흠조(金欽祖) 묘 출토 소형 백자 호(1528년), 박윤량(朴允良) 묘 출토 명기 일괄(1540년경), 김임(金銋) 묘 출토 명기 일괄(1561년), 유세화(柳世華) 묘 출토 명기 일괄(1586년) 등을 통해 일상용기와 함께 부장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덕 11년(1516)’명 백자명기 일괄과 함께 백자지석이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사서인 계층의 명기 사용은 16세기 이후의 일로 판단되며, 백자와 함께 와기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형 명기 부장이 본격화된다. 노옥손(盧玉孫) 묘 출토 백자명기 일괄(1560년경), 권수(權守) 묘 출토 백자명기 일괄(1580년), 광해군 묘 출토 백자명기 일괄(1589년), 권경남(權慶男) 묘 출토 백자명기 일괄(1609년)에서는 일상기명을 작게 만든 명기와 인물상, 마상(馬像), 기마인물상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유적 발굴조사에서도 백자명기를 비롯하여 와기로 제작된 명기가 다량 확인됨으로써 이러한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백자로 만들어진 명기는 문양이 없는 순백자도 있지만, 청화백자, 철화백자, 투각백자 등 다양한 장식기법이 활용되어 제작되었다.
명기는 순장 풍습의 부적절함을 타파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명기 문화가 정착한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위계질서에 따른 예의 실천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자가례의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진 16세기 중반이 넘어서야 소형의 명기가 부장되었다. 이러한 명기는 자기 · 도기 · 와기 · 목기 · 칠기 등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어 당시 공예품에 대한 연구에도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지석과 함께 조선시대의 상장례 풍습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