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에현 조선인 학살사건 (M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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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26년 1월 일본 주민들의 습격으로 조선인 노동자 2명이 학살된 사건.
이칭
이칭
삼중현혈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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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6년 1월 일본 주민들의 습격으로 조선인 노동자 2명이 학살된 사건.
경과

미에현이 발주하는 미에켕 남해안 터널공사가 1925년 1월 16일 시작되어 11월 20일 도갱(導坑)이 관통되었다. 이 터널공사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의 수는 200여명이 넘었는데, 사건 당시에는 47명(가족을 포함하면 70명 정도)이 살고 있었다.

1926년 1월 3일 저녁 무렵, 키모토(木本)의 주민들이 집단으로 키모토중학교 부근에 있는 노동자 함바를 습격했다. 습격이 시작된 지 수십 분이 지나서 함바를 뛰어나와 시가지에 들어선 이기윤(李基允)이(당시 25세, 가족 거느림) 일본인에게 포위되어 노상에서 참살되었다. 살해된 시간은 오후 5시. 이기윤은 다른 노동자와 가족들의 퇴로를 만들기 위해 터널과 반대쪽인 시가지로 뛰어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주민들은 일본인 노동자가 거주하던 함바를 조선인 노동자의 함바로 착각해 습격하기도 했다. 습격을 주도한 일본인들은 니시 타다시로(小西忠四郞,50세)를 비롯한 재향군인과 청년단원, 소방수들이었다. 습격을 당한 조선인들은 일부는 터널 밖으로, 일부는 함바 뒤의 산으로 도망했다.

석양이 완전히 넘어가자 키모토재향군인분회 소속원들은 산으로 도망간 조선인 습격을 위해 모인 후 분회장 타니가와 기이치(谷川義一)의 명령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조선인이 작업용 다이나마이트로 반격을 하자 일단 퇴각한 후 사냥총을 가지고 와서 사격을 하며 조선인들을 추격했다.

이 과정에서 오후 7시경 조선인 배상도(裵相度, 29세)가 시가지에서 함바로 향한 길목에서 참살되었다. 배상도가 살해된 지점은 두 시간 전 이기윤이 살해된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살해된 조선인들은 모두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인 주민들이 조선인을 습격한 이유에 대해 가해자들은 ‘공사에 종사하는 조선인들의 태도가 방약무인하며, 돈도 없이 음식을 먹으며, 상품값을 떼어먹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사건이 발생한 후 키모토경찰서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수사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소방서원이나 군인분회 사람들이 경찰서의 업무를 도와서 사태 처리와 조선인 수사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했다. 즉 가해자인 일본인들이 도리어 조선인을 체포해 수사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1월 6일까지 소방서원과 군인분회 소속원, 청년단원들은 경찰과 함께 약 50명의 조선인들을 모두 체포해 취조에 들어갔다. 체포된 조선인들은 경찰 유치장 수용능력을 초과했으므로 소학교내에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수용하기도 했다.

1월 7일, 체포된 조선인 가운데 윤정진(尹貞鎭) 등 20명의 조선인이 소요죄로 예심재판소에 송치되었다. 예심에 회부되지 않은 조선인 30명은 경찰의 감시 아래 야밤에 배에 태워져 토바(鳥羽)로 이송되었다.

가해자인 일본인들에 대한 체포는 1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이틀간 20명의 주민이 취조를 받았고, 이 가운데 5명만이 구류되었다. 이들은 14일에 압송되었다. 다음날에는 2명의 일본인이 추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17명이었다.

결과

5월 3일자로 아노츠(安濃津)지방재판소 예심판사가 제출한 예심종결서에 의하면, 습격에 저항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는 소요죄가 적용되었고, 일본인들에게는 살해치상죄, 소요죄, 살인미수죄 등이 각각 적용되었다. 그러나 예심이 종결되자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0월 30일에 내린 판결에서 조선인은 김명구(金明九) 징역 3년, 윤정진 징역 2년, 이도술(李道述)과 유상범(兪相範)이 각각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그 외 조선인은 석방되었다. 일본인피고는 미치하라 소시(桃原增市) 외 3명에게 징역 2년, 기타 10명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투옥된 일본인의 가족들에게 키모토유지회는 생활비를 지급했고, 변호비용 일체는 유지회와 정(町)의 예산으로 지출되었다.

2명의 사망자 외에도 조선인의 피해는 매우 컸으나 실제로 조선인의 피해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시개(李是介, 23세)가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는 있으나 이외에도 총격에 의한 부상자는 매우 많았으리라 예상된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지역의 조선인 단체는 비판연설회를 개최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국내에서도 일간지가 ‘삼중현혈투사건(三重縣血鬪事件)’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의 진상을 소개하고 조선인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조선인을 습격하고 2명의 조선인을 살해한 일본인들은 지방 정부의 성원과 지원 아래 열린 재판에서 습격에 저항한 조선인들보다 더 낮은 형량을 받았다. 또한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고 쫓겨남으로써 미에현에서 일어난 조선인학살사건은 일방적인 조선인의 희생 속에서 종료되었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현재 학계에서는 일본인 주민들이 피식민지민인 조선인이 일본에 와서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굴종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참고문헌

『在日朝鮮人運動史-8·15解放前』(朴慶植, 三一書房, 1979)
「虐殺について」(金靜美, 『在日朝鮮人史硏究』18, 1988)
『三重縣 木本における 朝鮮人襲擊』
집필자
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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