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 · 정관재(靜觀齋). 박조(朴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기찬(奇欑)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 사국(史局)에 돌아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어 설서 · 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당후(堂後)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 이조정랑 · 사간원정언 · 이조좌랑 · 헌납 ·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
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直講)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 사성 · 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좨주(祭酒)로 있다가 해서(海西)를 안무(按撫)하였다.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 · 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 사헌부로서 호남 · 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1567년(선조 1) 대종백(大宗伯)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儐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奇大升) · 이후백(李後白) · 이산해(李山海)가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낙촌유고(駱村遺稿)』가 있다.